읽고 보고 그리고.....
책) 난설헌, 나는 시인이다
떨켜
2008. 10. 8. 11:47
여인의 당당한 삶, 그리고 고통과 시
윤지강
예담
아프다, 초희를 만나는 순간부터 많이 아팠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은 헛간에 갇힌 머슴을 구해 함께 말을 타고 탈출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심상치 않은 그녀의 삶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프롤로그가 아닌가?
그녀도 여인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꿈꾸었을 것이다.
단란한 가정이 주는 아늑함도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어미의 행복도 지어미의 사랑도 모두 잃어버린다.
하늘은 재주 많은 여인에게 평범한 행복까지 주지는 않는다.
어려서부터 명민하고 시재가 탁월했던 초희는 자의식이 강하다.
남편한테 당당히 속마음을 얘기한다.
"더 이상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
자식을 먼저 보내야 했던 어미의 고통에 찬 절규이며
사랑이 없는 남편에게 더 이상 여자이고 싶지 않다는 독하디 독한 일침이다.
여자는 그저 참아야하는 수동적 존재이기만 했던 유교와 성리학에 몰입해 있던 500여 년 전
이렇게 확실한 자기표현을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이조 오백년사에 최초의 페미니스트라해도 과장된 말은 아닐 것 같다.
여자는 숙명적으로 남자에게 예속되어 살아야 했던 시절
초희는 당당히 집을 나온다. 시어머니도 법도도 친정 가문도 그녀를 막지 못한다.
시인의 스승은 말한다.
시를 쓸 때는 성심을 다해 써라
시인은 진짜 사람이 되어야한다.
진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진짜가 되어야하고
타인을 진짜사람으로 대접해야 한다.
너 자신의 내부 깊숙한 곳의 속사람과 대면하라.
진정한 인간 그 속사람과 가열하게 대면할 때만 진정한
시인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녀를 시인으로 만들어 준 것은 고통이다.
세상 모든 억압과 불평등과 불합리였다. 민중의 고단한 삶을 볼 수 있었던 것도
그 아픔을 겪어볼 수 있었던 것도 껍질을 부수고 세상 밖으로 나온
그녀만의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초희는 시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시는 그녀에게 자식이었고 남편이었고
사랑이었다. 시 속에서 자유로웠고 시 속에서 행복했다.
쌀이 없을 때 시집을 필사하여 쌀을 얻는다는 생각은 참으로
파격적이고도 경제적인 행위가 아니었던가?
양반은 얼어 죽어도 곁불을 쬐지 않는다는
명분 사회였던 그 시대에 초희의 자유로운 발상은 거침이 없다.
초희를 연모해 혼자 살았다는 첫사랑 황연의 고백에도 그를 돌려보낸다.
피가 마르고 사지육신이 뒤틀리는 고통을 받을지언정
세간의 시선을 이겨낸 그녀에게 크고도 강한 의지를 보았다.
세상은 가혹했고 삶은 모질었다.
지친 세상에 아무 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던 듯 시집을 불태워달라고 유언한다.
영혼이라도 자유롭게 다비를 부탁한다.
그것마져도 가시울타리속에 가두어버리는 세상
초희 난설헌은 시가의 묘역에 매장된다.
소설가 윤지강은 난설헌을 그렇게 살려냈다.
누구보다 독창적인 삶을 살고 싶었던 시인으로의 삶을 불꽃에 비유했다.
딸에게 글과 시를 가르친 아버지와 누이의 예술가적 성향을 인정해주고 싶었던 형제들
그리고 시인으로 살기를 원했던 난설헌 모두 시대를 앞선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을 생각하며 난설헌의 묘역에 꽃이라도 한송이 놓을 수 있기를 바래본다.
소설 내내 순우리말의 향연(?)을 볼 수 있어 특별한 시간이 되었다.
자닝하다, 주니, 흥글방망이, 하리놀았다. 울남한, 사로자다, 게정, 시르죽은,
습습한, 조쌀한, 데시근, 는질맞은, 비나리, 타근한, 는실난실한, 나볏나볏,
아둑시니, 가붓한, 거늑한, 던적스러운, 대살지게, 야자버리고 등 사전을 찾으며
잊혀져가는 고운 우리말을 배울 수 있어서 작가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