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남도로의 여행이 그랬다. 느닷없이 선물을 받을 때의 기분이랄까 글사랑 모임의 영숙씨 전화는 그렇게 왔다.
전남문인협회 초청의 문학기행이 있다는 것이었다. 몇 번 온 적이 있었던 남도의 인상은 푸근하고 따스했었다. 사람들 말꼬리가 느닷없이 올라가거나 심하게 내려오는 것처럼 굴곡이 심해서 재밌기도 하였다.
그날은 운이 좋게도 길을 잃은 운전기사 아저씨 덕분에 화순 골짜기를 여기저기 구경할 수도 있었다, 다소 피곤하기는 하였지만. 보성으로 들어서자 18번 지방도로의 메타세콰이어길은 너무도 아름답다 못해 훌륭하여 감탄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푸르던 잎은 가을 빛에 말라져 노르스름하기도 하고 불그죽죽하기도 한 묘한 색으로 꽤 긴 길을 장식하고 있었다. 누가 심었을까 사 오십년 정도는 되었을 그 옛날에 어떤 마음을 가진 이가 이런 길을 만들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길 위에서 나무 심는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영랑 생가가 있는 강진에 도착하니 전남 문협 샘들이 나오셔서 반겨 주셨다. 이번 여행에 초청해주신 분들답게 많은 준비를 하신 것 같았다. 영랑 생가는 조촐하지만 단정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특히 뒤뜰의 동백과 대숲은 너무나도 인상적이어서 저절로 시흥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민속촌에 온 것처럼 잘 보관되어 있는 농사 기구들, 불 때는 아궁이와 솥, 우물, 장독대와 넓은 정원은 가장 향토적인 것을 사랑한 시인의 언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특히 시인의 아드님이 직접 설명해주시니 더욱 감개가 새로웠다.
(영랑 생가 입구의 돌담과 담쟁이)
(동백나무와 대숲, 동백나무가 많다)
남도 삼합의 점심으로 우리의 배 속을 즐겁게 한 후 강진 청자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강진은 9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고려청자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전시된 청자들을 보니 문외한이지만 색감과 모양이 정말 아름답다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쪽 방에서는 주말 청자 경매가 진행되고 있었다. 뒷 쪽에 서서 잠시 구경하고 있었는데 진행자의 돌발 퀴즈를 내가 맞히게 되어 작은 찻잔을 선물로 받으니 새로운 기쁨이 하나 더 추가 되었다.
우리는 달리고 달려 편백나무 숲이 있는 우드랜드에 도착하였다. 쭉쭉 뻗어있는 편백나무 사이를 걷고 있으니 오장육부가 깨끗해지는 듯 하고 머리가 맑아졌다. 여기 저기 함께 혹은 혼자 숲속을 거닐다보니 자연이 주는 고마움이 얼마나 큰 것 인지 새삼 피부로 느껴졌다. 숙소가 있는 장흥 탐진강 둔치에서 약간의 자유시간이 생겼다. 국화가 강을 따라 피어 있어 걷다가 몇 명이서 수건 돌리기를 하며 놀았다. 약간 춥기도 했었는데 우리의 마음과 몸이 벌써 훈훈해지고 뛰고 달리며 웃느라 시간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저녁을 잘 먹고 (차려주는 밥 먹으니 이 또한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해방된 기분이다.)
장흥 천문대를 구경 갔다. 천체 투영실에서 계절별 별자리 여행도 하고 4d시뮬레이션도 보고 설명도 듣고 실제로 망원경으로 달과 목성도 보았다. 구름이 많아 보기 어려웠는데 언뜻 잠시 얼굴을 보여주는 순간에 분화구로 굴곡진 달표면과 보랏빛 띠를 두른 목성을 볼 수 있었다. 그 느낌은 굉장히 강렬했고 신비하였다. 아아!!!!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상상하던 것을 직접 본 느낌이었다.호텔에 돌아와 안온한 잠에 빠져 들었다.
이튿날은 보성으로 향했다. 우리의 소리 공연이 있어 심청전을 들었고 녹차를 마셨다. 마음이 풍성해지고 노곤한 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녹차밭은 언제 와도 좋구나. 마악 새싹을 돋우려는 봄햇살 가득한 다원에서의 환희를 보았는데 지금은 하얀 녹차 꽃이 피어있었다. 마당에는 핏물 뚝뚝 떨어지는 단풍나무가 바람을 타고 있었다. 아, 이 남도의 화려함이여! 삶의 풍요로움이여! 또한 가치를 지키려는 고단함이여!
이동하는 차안에서는 문협 회장님께서 직접 고장 설명을 해 주셨고 자작하신 동시 낭송을 해 주시기도 하였다. 참으로 고향을 살리고 지키려는 많은 애를 쓰시는 분들이었다. 외서댁 닮은 꼬막 정식은 벌교의 매력에 또한번 빠져 들게 하였다. 맛난 점심에 느긋해진 마음으로 태백산맥 문학관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태백산맥을 탄생시키기 위해 쏟았던 작가님의 열의와 노력에 새로운 긴장이 몰려왔다. 사람 키를 넘는 육필 원고와 그 많은 펜들, 태백산맥의 많은 인물들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았던 책 태백산맥. 태백산맥의 매력은 많고도 많지만 전라도 사투리를 젤 많이 구사한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젓갈처럼 강렬하고도 감칠맛나는 사투리에서 남도 사람들의 소리와 문학과 맛이 탄생했을 것 같다. 참으로 매력적인 사투리였다.
(문학관 옆에 재현해 놓은 현부잣집 안에 있던 굴뚝)
전남문협샘들과 감사한 마음으로 작별을 하고 차에 올랐다. 나에게 불쑥 찾아와 선물을 가득 안겨준 강진, 장흥 .보성이여. 모두 다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