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사람 노릇

떨켜 2013. 12. 11. 15:07

겨울비가 죽죽 내리던 지난 월요일 내가 집을 나선 것은 오전 10시 쯤이었다.

한 손엔 우산을 들고 한 손엔 어제 독산동 소 부산물 시장에서 사 온 소 허파를 담은 스치로폼 박스를 들고였다. 요즘 굴이 맛있는 계절이라 굴 먹을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나서 엄마한테 가는 길이다.

짐이 있어 차를 갖고 가려다 비가 오면 운전하는 게 겁나는 기억 때문에 급행 전철을 타러 신도림으로 갔다.

여름에는 급행 타는 곳으로 가려면 육교를 두 개나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한참 돌아가야 했는데 그날은 공사가 끝났는지 동선이 짧아져서 힘이 덜 들었다.

10시 36분에 용산발 전철이 도착했다. 아침 분주한 시간이 지나서 전철 안은 한가하다. 자리도 잡았다.

대부분 노인들이 삼삼오오 앉아 심심풀이 시국 얘기를 하시는지 조금 소란스러울 뿐이다.

아랫녘으로 내려 갈수록 창밖에는 빗발이 더 굵어지는 것 같았다.

가을걷이를 끝낸 들녘도 스산하기만 하고 공장지대도 주택가도 비에 젖어 을씨년스럽다.

 

천안역에 닿으니 12시다.

서부역으로 내려가 대기중인 택시를 타고 가니 금방이다.

엄마는 티비를 보고 계시느라 내가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계시다가 깜짝 놀란다. 그러지 않아도 놀라지 말라고 초인종도 미리 누르고 들어왔건만 귀가 어두워 못 들으신 게다.

"아이구, 니가 벌써 왔냐? 한 시 도착이라며? 조금 있다 우산 갖고 나가려고 했는디."

평소 같으면 엄마가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릴게 뻔해 전화를 안하고 오는데 혹시 소 허파가 겹칠까봐 아침에 전화를 드렸다. 한 시에 도착한다고 말을 했더니 그러길 잘했다.

"응, 빨리 왔네. 전철이라 막히는 게 없어서."

 

엄마는 올해 93세시다.

일년에 한 번 정도 병원 신세를 지시지만 강건 체질이라 지병은 없다. 지금도 집앞 강변을 산책하실 정도로 걸음도 좋다. 목소리에 한겨울 칼바람 같은 기가 들어있다. 그러나 가끔 어지럽다고 하시는데 소허파를 먹으면 나아진다고 하신다. 몇년 전 담낭 제거 수술을 받고 나서는 기름기를 먹으면 설사가 심해 아예 육식을 금해야 했다. 소허파는 한 마리 분량을 사야한대서 산 그대로 들고 왔는데 펼쳐보니 무척 신선하다.

얼른 다듬어서 일부는 물을 넣고 삶아 드렸더니 소금만 찍어서 먹어도 맛있다고 좋아하셨다. 나머지는 한 번 먹을 분량으로 나누어 냉동실에 넣어드렸다.

"이게 많아보여도 익히면 많이 줄어드는 것이니 얼마 못 드실거유. 다 드시고 생각날 때 또 사올게."

"야야, 한참 먹겠다야. 이걸 언제 다 먹누."

그러면서 또 한 점을 소금에 찍어 드신다.

"냉동아닌 생 것이라 맛있구나 .그리고 이 굴국도 참 맛있다. 이따 애비 오면 먹으라해야지. 시원하고 좋네"

그저 혼자 사는 아들 먹일 생각뿐이신 우리 엄마.

"걔는 밖에서 다 먹고 다녀요. 엄마나 맛있게 드시면 되지. 뭐."

"아녀. 밖에 것은 안 좋은 게 많아. 이 맛이 아녀."

 

먹을 것을 해드렸으니 이번에는 청소할 차례다.

주방은 참으로 할 게 많은 곳이다. 그릇과 수저와 행주를 삶아야하고 냉장고를 다 뒤집어 버릴 것 버리는 정리를 해야한다.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전기 밥솥도 샅샅이 살펴야 한다.

청소기를 돌려 바닥을 청소하고 욕실로 들어가면 할 일 또한 만만치 않다. 게다가 세면대 위의 전등이 나가 사워실 전등만으로는 컴컴하다. 세면대 트랩을 분리해 이물질을 빼내고 칫솔로 문질러 비누 찌꺼기 뭉쳐 있는 것까지 털어내야 하고 세면대도 바닥도 거울도 변기도 닦아야 한다.

엄마는 나를 따라다니며 미안해서

"아이구 고만해라. 깨끗한데 그만하고 좀 쉬어라." 그러셨다.

다하고 저녁먹고 잠자리 바뀌면 불면인게 싫어 상경하겠다고 하니 펄쩍 뛰신다.

"비 오는 이 밤에 무슨 소리냐? 내일 가라."

 

잠이 안 와 엄마모르게 몸살약을 먹고 낮은 베개로 바꿔 베었더니 그런대로 잘 잤다.

아침 먹고 상경하려고 나왔는데  자꾸 욕실 전등 나간 게 걸렸다. 그런데 엄마네 동네는 한적한 곳에 있어 전등 살 곳이 없다. 일봉예식장쯤에서 전등을 사려고 가게에서 물어보니 잘 모르신다.

가게가 있다하더라도 어떤 전구인지 확인 못했으니 일단 다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다시 엄마 집으로 들어가서 현관 앞 수납장을 몽땅 뒤져 새 형광등을 하나 찾았다. 형광등 덮개를 벗겨내고 교체를 하니 너무나 환하다.

"엄마, 꼭 불 켜고 들어가셔. 눈도 잘 안보이는데 환해야 하니까. 그리고 항상 잘 씻고."

"그럼, 맨날 씻는다. 걱정 말어. 아이구 딴 세상이 됐네. 네가 있으니 정말 좋다."

다시 나오려고 하니 점심이 걸린다. 점심 먹고 나니

"너 내일 가라. 아니 며칠 더 있다가라. 뭐가 불편한 게 있어? 눈치 주는 사람 없고 나랑 좀 여기서 푹 쉬고 가."

'아이고 엄니, 내 맘도 엄니 밥 더 해드리고 싶지만 내 집이 편하다우. 집에 가야 잠도 잘 오고.'

마음속에선 그렇지만

"아주 짐 싸가지고 와도 되유? 나 갈 데 없을 때 여기로 오지. 그땐 딴 말 없기유. 일단은 올라가고."

 

천안역에 오니 어제부터 철도가 파업이라 기차는 KTX만 정상 운행하고 일반 기차는 감축운행이란다. 내려 올 땐 전철타도 올라갈 땐 무궁화가 편한데 어케하나 전철 급행도 금방 떠나고 그래서 완행 전철을 탔다. 집에 오니 세시간이 걸렸다.

녹초다. 밥도 못하고 남편 들어오는데 일어나지도 못했다.

"힘들지?"

"응. 힘드네."

"그러게 말야. 사람 노릇은 다 힘들어. 당신은 몸 약해 더 힘들지?"

그래도 이해해주는 남편 맘이 따뜻해 피곤도 약간은 녹는 것 같다.

오늘은 약 안먹어도 잠을 잘 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