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텃밭을 가꾸며
떨켜
2015. 11. 2. 14:57
밭에 가려면 요즘 같은 6월이면 아침부터 서둘러야한다. 조금만 늑장을 부리다가는 아까시나무 숲을 관통한 햇살이 내 머리 위에 불화살을 쏘아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밭은 집에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있지만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도회적인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시골스러운 곳에 있다. 농장 입구의 울퉁불퉁한 황톳길에 들어서면 우거진 잡목들 사이로 도시농부들의 터전이 보인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 터라 농장에는 한층 생기가 돌았다. 농장 입구에서 내 밭으로 가는 짧은 시간동안에도 발걸음보다 앞서가는 마음을 따라 모가지도 덩달아 기린처럼 늘어난다. 내 것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내가 정성을 쏟아 품을 들이고, 나의 땀방울들이 모여 거름이 되는 무엇일 게다. 내 가슴을 설레게 하고 소중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하는 이 서너 평밖에 안 되는 땅뙈기가 또 하나의 내 것으로 내 안에 둥지를 튼 것도 벌써 십여 년이 넘었다.
맨 처음에 텃밭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아들네 집으로 상경하신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 무렵,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병고와 주거환경의 변화로 인해 매우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계셨고, 어머니를 안정시켜 드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을 때에 텃밭을 분양한다는 현수막을 보게 되었다. 나는 ‘옳다구나. 농사로 평생을 살아오신 분이니 흙을 만지면 정서가 안정이 되실 거야.’ 라고 생각하고 신청하였다. 한 때는 만 평에 가까운 농사를 지으시던 분이 손바닥만한 땅을 보고는 어이가 없어 하였지만 우리 집에 오실 때면 밭에 가기를 즐거워하며 땅을 어떻게 파야하는지 씨앗은 어떻게 심어야 잘 나는지 알려주시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파리해진 어머니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래. 너 잘 생각했다. 너는 어려서부터 흙을 좋아하고 거머리 무섭다고 하지 않고 논에 들어와 모내기도 돕고 그러더니 텃밭을 하게 되었네. 푸성귀라도 기르고 가꾸어 먹을 생각을 하다니 너다운 생각이다.” 어머니를 위해서 텃밭을 하게 된 거라고 말을 하지 않았더니, 어머니는 내가 자발적으로 자연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고 흐뭇해하셨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텃밭을 하다보니 어머니보다 내가 더 텃밭을 좋아하게 되었다. 텃밭도 집근처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하여 좀 더 전원적인 분위기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다. 이렇게 농사 연륜이 쌓이다보니 텃밭이 주는 마음의 평화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깊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텃밭이 나의 해우소가 된 것이다. 살아가면서 무엇을 어찌해야하나 판단하기가 어려울 때, 이래저래 속이 상해 위안을 얻기 힘들 때면 나는 텃밭으로 달려갔다. 잡초를 뽑아주고 쓰러진 작물에는 섶을 꽂아 세워주고 더위에 목마른 흙을 축축하게 적셔주며, 나는 내 안의 근심 걱정을 뽑아내고 흔들리던 중심을 찾을 수 있었으며, 욕심에 들떠 괴로웠던 마음을 차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올해는 유난히도 봄 가뭄이 심했다. 뉴스에서는 남녘의 갈라지는 논바닥을 걱정하였다. 텃밭 농장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물차가 등장하였다. 물차 한 대 값이 만만치 않아 농장지기의 근심이 클 것 같았다. 물을 싣고 좁은 언덕을 오르고 있는 트럭을 보고 있노라니, 그 옛날 용두레로 논에 물을 대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키조개 같기도 하고 돛단 배 같기도 한 작은 용두레에는 고작 한 두 바가지의 물 밖에 담지 못한다. 그런데 그 작은 용두레로 너른 논에 물이 찰랑거리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용두레질을 해야 했을까. 이제야 논에 가신 아버지가 해가 다 기울도록 돌아오시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봄이면 텃밭에서 상추, 열무, 고추, 가지, 오이 등을 얻어오고, 가을이면 김장거리를 마련하기도 한다. 농사를 잘 지어보았자 시중에 파는 채소들보다는 훨씬 작고 실하지 못하다. 그래도 야무지기는 해서 오랫동안 보관을 해도 쉽게 물러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텃밭 농사를 매 해 잘 짓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해는 배추가 폭삭 썩어버리기도 하였고, 고추가 시들시들 말라가다가 죽는 것도 보았고, 상추가 뿌리혹병에 걸려 못 먹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진짜 농사를 짓는 농부들의 마음 언저리에 서 보게 된다. 정성을 다해 기른 농작물이 여러 가지 이유로 제대로 된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분들의 심정이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까? 텃밭 농사를 지어가며 낱알 한 톨에 얼마나 많은 농부들의 마음이 들어있을까 새삼 생각하게 된다.
요즈음은 친환경적 재배 작물에 소비자들의 관심이 많아져서, 유기농 매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농사를 지어보니 무농약이나 유기농재배가 절대로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유기농은 흙이나 작물에 3년 동안 화학 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인정받아야 인증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작물을 쉽고 편하게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농부에게는 크고 강한 유혹이어서 확고한 자기 의지와 신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열무에 진딧물이 꼬이고 작은 총탄을 맞은 것처럼 구멍이 뽕뽕 뚫려 있을 때 약을 “쳐? 말어?”하고 이 작은 텃밭에서도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지금도 온 마음으로 생명 살리기를 실천하고 계신 분들이 존경스럽기만 하다.
고마리
열무밭
고추꽃
가지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