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도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니다 보면, 각 지역마다 산세와 들녘이 조금씩 다른 것을 알게 된다. 무주에 도착하니 덕유산 줄기에는 큰 바위가 돌출되어 있는 곳이 많다. 또 식생하는 나무들의 종류도 다른지 단풍이 대전과는 다르게 보인다.
무주는 남편에게는 추억이 있는 곳이라 했다. 젊은 시절에 친구와 버스와 기차를 타고 전국을 순회한 일이 있다고 했다. 무주에 도착했을 때 비가 오는 밤이라 무척 고생한 기억이 남아있다고 했다. 편하고 좋은 기억보다 고생하고 험했던 기억이 오래가나 보다. 그래서 휴양림 입소하기 전에 구천동 계곡으로 향했다. 물이 없는 계곡은 풍광도 좋지 않다. 그래도 사람 없는 길을 따라 어사길 근처까지 걸었다.
무주구천동 계곡의 폭포
덕유산 휴양림에 도착하니 방바닥이 따뜻하였다. 날씨가 쌀쌀해지니 손님을 위한 배려인 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이부자리도 커버를 새로 갈아놓아 정갈하였다. 시립인 장태산 휴양림은 차렵이불을 줬는데 남이 쓰던 것 같아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래서 국립휴양림이 좋다고 혼자서 중얼거린다.
저녁을 먹고 나니 어제 못 잔 잠이 쏟아진데다가 온도도 알맞고 침구까지 깨끗해서 아침까지 잘 잤다.
휴양림 뒷산은 선인봉이다. 우린 선인봉에 오르지 않고 너무 무리하지 않게 휴양림 근처를 산책하기로 했다. 임도를 따라 올라가니 독일가문비나무 숲이라는 팻말이 있다. 숲 입구에서부터는 나무 데크가 놓여져 있다. 나무 이름에 왜 독일이라는 글씨가 들어가 있을까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오시던 흰 머리가 구불구불하신 어떤 분이 그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독일 가문비나무 숲길자드락길
바로 숲 해설가셨다. 독일가문비나무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실제로는 노르웨이에서 들여온 가문비나무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가 독일이라는 명칭으로 붙여서 지금까지 독일가문비나무로 불린다고 했다. 독일가문비나무는 악기를 만들면 좋은 재질이라서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현악기를 만들 때 몸통으로 쓰인다고 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가지를 뻗는 층층나무와 너와지붕 재료인 굴참나무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작년까지는 일정한 시간에 지정된 장소에 모인 탐방객들이 해설사와 함께 걸으면서 설명을 들었다면 올해는 전염병으로 그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없어서 해설사님 혼자 숲에 있다가 누구를 만나면 설명을 해준다고 했다. 설명을 들으니 나무를 더 잘 알게 되어 느낌이 풍성해졌다. 나는 좋은 시간이었다고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분은 오히려 나에게 더 고맙다고 했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알맞은 반응을 보여줘서 본인도 신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데크가 끝나면 작은 오솔길이 나오는데 꼭 걸어보길 강추 했다. 정말 그랬다. 오솔길은 정말 예뻤다. 두세 뼘 정도로 좁은 길이었는데 고장난 벨트처럼 산허리를 느슨하게 감고 있었다. 남편과 둘이 이 아름다운 자드락길을 걷고 있으니 가을의 여유 속에 빠져 드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산을 내려와 다시 골짜기를 따라 독일가문비나무 숲 입구 께로 갔다. 맞은 편 산은 벌목하여 무슨 묘목을 심어놓은 것을 보고 무엇일까 했었는데 해설사의 말씀에서 자작나무 숲을 조성 중이라는 정보를 듣고 다시 가 보기로 한 것이었다. 10년 20년 후에 우리가 다시 이 숲에 오게 될까. 그땐 멋진 하얀 수트를 입은 자작나무가 자작의 품위로 숲을 지키고 있을 텐데. 머릿속에는 벌써 아름다운 숲의 향연이 그려졌다.
휴양림을 떠나기 전에 꼭 느껴지는 감흥이 있다. 서울로 돌아가기 싫어지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떼를 써서라도 더 오래 이곳을 떠나지 않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정말 좋은 곳이었어. 내년에도 그 후에도 또 찾아올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본다.
우리는 지도를 펼쳐 놓고 어느 쪽으로 갈까를 정하다가 나제통문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길 37번 국도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답게 정말 아름다웠다. 고운 단풍이 수를 놓은 듯하고 한가로운 길은 이어져 있다. 도중에 병풍 같은 바위산이 있어 차를 세웠는데 그곳이 수심대라고 했다.
계곡과 절벽이 기가 막히게 어우러진 곳이었다. 다시 차를 달리니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경계였던 나제통문에 다다랐다.
산 중턱에 사람들이 사는 정겨워 보이는 마을들
다리 입구에 세워진 설명문을 읽다보니 이곳에서 죽어간 원혼들이 수없이 많았던 전쟁터였다. 전쟁은 무슨 명목이든지 간에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 그것도 선량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제일 많이 죽게 만든다. 잠시 원혼들을 위한 기도를 하고 통문 이쪽저쪽을 다녀 보았다. 통문은 바위를 뚫어서 만든 것 같았는데 바로 아래가 강물이 흐르는 지형이라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리는 나중에 놓인 것이 틀림없을 텐데. 역사적으로 고증이 된 것일까 의구심이 들었다.
무주는 전에 우니람바니람(운일암반일암을 소리나는 대로 적어보았다)에 온 적이 있었으니 두 번째 방문이었다. 언제 다시 오게 될까 그때까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