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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여행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
두 딸을 키우면서 딸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하여도 가족 나들이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중, 고등학생이 되면서 가족 여행은커녕 단출한 네 식구가 밥을 같이 먹기도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아이들이 이른바 입시지옥이라는 대입을 위한 총력전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총력전 덕분인지 아이들은 순조롭게 대학생이 되었으나 바쁘기는 한층 더하고 하룻밤 자고 오는 국내 여행도 날짜를 맞추기가 매우 어렵기만 했다. 더구나 3년 전에 둘째 딸 제이가 독일로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가족 여행의 꿈은 더욱 요원해져가고 있을 즈음의 작년 가을이었다. 제이가 일본 규슈에 있는 대학교로 교환 수업을 받으러 오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가족 여행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우리는 원격 회의 끝에 규슈로의 가족 여행을 결정 했다. 그 때는 마침 휴가 일수가 남아있는 남편 회사 일정이나, 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지쳐있었던 큰딸이나 모두 휴식이 필요한 터였고, 나 역시 일상의 피로를 식히고 싶었던 때이기도 하여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이벤트였다.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낸 제이는 더더욱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거라며 기뻐하였다. 다행히 제이의 수업에는 지장이 없는 교내 축제 기간이어서 부담이 없었던 점도 우리의 여행에 짐을 덜게 된 일이었다.
일정은 규슈지역만 여행하기로 하고 기간은 3박 4일간으로 정하였다. 숙박은 제이 숙소인 학교 사택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우선 큰애는 일본의 교통비가 매우 비싸다는 점을 알고 있어서 JR패스권을 인터넷으로 예매를 하였다. 세상이 스마트해진 시절이라 일본 기차표를 예매하는 것도 아이들에겐 쉬운 일이지만 아마도 큰애가 이번 여행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거나 도와주지 못했다면 우리에겐 매우 어려운 일일 수도 있었겠다싶었다. 그리고 구마모토 성과 유후인으로의 여행 계획을 세우는 일도 두 딸이 척척 손발을 맞추니 환상의 호흡이었다.
인천공항에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후쿠오카공항이 있다. 우리가 후쿠오카에 도착했을 때 가을비가 내린 후라 을씨년스러웠지만 작은딸을 만난다는 기쁨과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설렘으로 들뜬 마음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하카타역에 도착했다. 그 역은 서울역보다도 더 복잡하고 사람도 많아 보였다. 그래도 미리 약속해놓은 장소가 있어서 제이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제이는 3년 전 서울을 떠날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다만 한 가지 3개월 사이에 일본어로 일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점이 고마운 일이었다. 큰애는 인터넷으로 식당이며 상점을 찾아보고 제이는 말이 필요할 때에 나서서 통역을 해주니 남편과 나는 딸들만 따라다니면 되었다.
근처 식당에서 덮밥 요리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지은 지 40년이 넘었다는 3층짜리 연립주택인 숙소에 도착하였다. 15평 남짓한 다다미 구조였는데 학생 혼자 살기엔 호사다 싶을 정도로 아담하고 정갈한 집이었다. 짐을 풀면서 커다란 아이스박스에 담아온 김치와 불고기, 젓갈 등 반찬을 보며 제이는 너무나 좋아하였다.
“엄마 냄새야.”
그러더니 아빠와 언니를 보고 무안했는지 된장, 고추장을 열어보며
“집 냄새야.”
그랬다.
‘고향 냄새지. 뭐’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우리 아이들에게 고향의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러나 외국에서 살다보면 고향이 도시거나 시골이거나 그리운 고향 냄새가 있을 것도 같다, 제이가 찾아낸 그 냄새 같은 것이.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우리는 거실에 누워 완전한 가족의 꽉 찬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다음 날 우리는 구마모토 성을 구경하기 위해 신칸센을 탔다. 신칸센은 유명세에 걸맞게 깨끗하고 소음도 없었으며 좌석도 넓고 편안했다. 그런데 제이가 자꾸 하품을 하였다.
“너 잠을 못 잤니? 하품을 자주 하네.”
내가 물어보니 머쓱해하며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옆에 앉은 큰애가
“엄마가 하두 코를 골아서 제이가 잠을 못잤대요. 나도 그렇고.”
그랬다. 나는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아이구, 이를 어쩌니? 내가 피곤했나 보구나. 미안하다.”
“아이 괜찮아. 하루 이틀 잠 못 자는 건 아직 견딜만 해요.”
아이들은 신경쓰지 말라고 하지만 신경쓴다고 해결 되는 일은 아니니 이를 어쩐담? 남편한테 “내가 심하게 골았수?” 하고 응원의 말을 기대하고 물었더니 “심했지.” 하며 더 나를 난처하게 골려주었다. 가족이 모였다고 다 좋은 일만 있으랴. 가족도 사는 방식이 다르고 습관이 다른 개개인의 집합이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불편함은 서로 이해와 배려로 상쇄시킬 수밖에.
구마모토 성은 둘레가 5.3km 라고 하니 과연 일본의 3대성에 들어갈 만한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본채인 천수각을 비롯해 여러 채의 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넓은 정원에는 5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와 벚나무가 매우 많았다. 특이한 것은 성의 외관인 기와와 창문의 목재도 모두 검은 빛이어서 매우 남성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각 채마다 석축으로 쌓은 기단이 5m정도로 높았는데 석축의 옆면이 활처럼 휘어져있는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 곡선의 돌들은 적군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만든 난공불락의 아이디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성을 만든 사람이 바로 임진왜란 때의 적장인 가등청정이기 때문이다. 성 입구에 있는 커다란 저수조나 성 안에 있는 많은 우물 등은 그가 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에 만든 비상 식량기지라고 하니 전쟁이 남긴 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채인 7,8층 높이의 천수각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니 연기를 뿜어내는 아소산이 보이고 구마모토현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위치다. 이렇게 좋은 전망대가 지킬 것이 많아 늘 경계를 해야하는 초소였다는 것은 별로 부럽지 않은 일이다. 궁궐에 산다는 것도 많이 피곤하고 불편한 일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천수각 꼭대기에서 마음 놓고 편히 살 수 있다는 것, 그 자유가 더욱 크게만 느껴졌다.
다시 하카타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5시쯤이었는데 큰애는 쇼핑을 하고 싶어 하였고, 제이는 집에 얼른 가고 싶다고 하였다. 큰애의 입장도 제이 입장도 모두 이해가 되는 상황에서 두 딸의 의견이 갈라질 때는 어찌해야 하나 난감해 하고 있을 때 남편의 절충안으로 쇼핑을 한 시간만 하기로 하였다. 아무래도 한 시간 갖고는 윈도우 쇼핑도 못할 것을 아는 큰애가 다음에 와서 제대로 쇼핑을 하겠다고 하여 대충 살 것을 사고 귀가 하였다. 큰애가 상황 파악을 하여 배려해준 것이 고마웠다. 집에 오자마자 제이는 식은 밥을 김치와 깍두기로 뚝딱 해치우더니
“최고야, 최고. 어휴, 여행 내내 김치 생각만 났어. 히히히”
우리는 그애의 그 모습을 보며 외국에서 살고 있는 그 애 생활의 단면을 보는 듯 측은한 마음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3일째 되는 날은 날이 너무나도 화창하였다. 햇살이 쨍하고 모든 것을 투과하여 투명하게 만들어 버릴 것만 같은 맑은 날씨였다. 전날의 피로로 늦잠을 자게 되어 기차 시간상 행선지를 유후인에서 벳푸로 바꾸었다. 유후인은 일본의 전형적인 전통마을로 온천, 산과 호수로 이루어져 있어 매우 아름다운 고장이라고 하는데 못 가게 되어 매우 아쉬웠다. 하지만 벳푸 역시 한번쯤은 둘러볼만한 지역이라 하니 기대를 갖고 출발했다. 벳푸로 가는 지역 기차로 이동을 하며 일본 농촌을 구경할 수 있었다. 농경지와 야산 등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촌락은 단지를 구성해 놓은 것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어 인공적인 느낌이 들었다. 일본 촌락을 보니, 자연적으로 산재해 있는 우리나라의 마을들이 더더욱 운치가 있게 느껴지고, 개개인의 필요에 따라 살 곳을 정하고 터전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느낌이 컸다.
벳푸역에 내려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장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참 친절하게도 시장까지 같이 가 주었다. 한 사람 겨우 지날 수 있는 골목길을 지나니 파는 물건도 가게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시장이 나온다. 그곳에서 먹을 것을 사 가지고 벳푸 온천지대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 택시 기사는 우리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는 대뜸 아이돌 이름을 대면서 아는 척을 했다. 몇 번 택시를 탈 때마다 한결 같다. 한류 열풍에다 관광객에 대한 예의로 그러는 것 같다.
벳푸는 유명한 온천지대인데 지옥 순례라는 8개의 온천이 있다. 화산으로 용출되는 온천수는 펄펄 끓은 현장감을 그대로 드러내며 증기를 뿜어 올렸다. 비취빛의 바다지옥은 지옥의 느낌이라기보다 아름답고 역동적인 호수라는 이미지로 느껴졌다. 진한 황토수의 지옥도 있다. 각 지옥마다 효능이 다르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 관계상 정원에 만들어 놓은 족욕탕에서 피로를 풀며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 구름 한 점 없이 파아란 하늘과 남국의 초록빛 나무들이 주는 청량한 분위기, 그리고 ‘가족 모두 함께 여기에 있다’라는 사실은 우리를 행복한 기운으로 충만하게 하였다.
지옥 순례를 마치고 귀가하기 앞서 큰애는 숙소로 가는 길목에 있는 모지코항에 들리는 게 어떠냐는 ‘깜짝’제안을 하였다. 모두 좋다고 하였다. 모지코항은 일본 개화기에 번성했던 항구로 서구문물이 수입되었던 현장이라서 20세기 초의 서구식 건물이 잘 보존된 아름다운 도시였다. 도시의 경관은 세련되고 정결하여 모지코 방문은 생각하지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관광객이 가는 곳이 아닌 일본인들이 가는 횟집을 찾아 저녁을 먹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사케도 한잔 하였다.
“이번 여행 어땠어요?”
일본 전통을 잘 살린 고급스런 분위기와 신선한 생선요리로 잘 차려진 식탁에서 식도락의 즐거움을 맛보는 일도 삶의 여유로운 모습이다. 더구나 그곳에 온 가족이 마주 앉아 여행의 에필로그를 나누는 시간이란 말해서 무엇하랴!
“나는 우선 여행사 패키지 여행이 아니라 자유 여행이라서 훨씬 여유가 있었다는 점이 좋았던 것 같아. 시간에 쫒기듯 다니는 게 싫더라구. 그리고 너희들이 알아보 고 의논하고 그러는 게 또 보기 좋았어. 이번에 보니까 이제 너희들이 우리의 울타리더라. 든든해.”
남편이 먼저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둘러보며 소감을 얘기했다.
“저도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한 시간이라서 소중한 추억이 될 것 같아요. 또 규슈의 동쪽과 남쪽을 두루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고요.”
제이 또한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고 얘기했지만 혼자 사는 습관에 익숙해져서 여럿이 지내기가 불편한 점도 많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는 취업이 쉽질 않아서 좀 지쳐 있었는데 다시 에너지를 얻고 가는 기분이 드네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긍정적 마인드를 갖기로 했답니다. 이래서 여행이 좋은 건가 봐요.”
분위기가 훈훈한 것은 사케에 취해서만은 아닐 터이다.
“난 이번 여행의 컨셉, 가족이 다 함께 했다는 것이 최고의 의미라고 생각해. 앞으로 주어진 위치에서 열심히 살고 또 이런 좋은 시간을 만들기로 합시다.”
우리는 술잔을 들어 건배로 약속을 하였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바로 숙소에서 1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수퍼마켓이다. 그곳은 상점에서 배달을 해주지 않아 일일이 들고 다녀야 하므로 우리가 떠나고 난 후 제이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물건을 미리 사다놓기로 하였다. 우리는 매일 양손에 물병과 과일과 부식을 들어날랐다. 배달이 잘되어있는 서울에서는 잘 경험하지 않는 쇼핑문화다. 그 덕에 그 동네의 골목골목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곳의 집은 대체로 크지 않았고 단순한 외관으로 매우 정결해 보였다. 아무리 터가 좁은 집이라도 몇 그루의 나무를 가꾼 곳이 많았는데 나무와 화분에서 정성스러운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길에서 집 대문으로 이어진 작은 계단 모퉁이나 좁은 담장 위에도 화단을 만든 것으로 보아 사람들도 예쁜 마음을 갖고 있을 것만 같았다.
3박 4일 동안 우리는 여행으로 가족의 온전한 일치를 경험했다. 약간의 갈등과 불편함도 있었지만 그것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지혜로 잘 해결하였다는 점은 우리를 정신적으로 한층 더 견고하게 만들었으리라. 그래서 그것은 훌쩍 커버린 우리 딸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일이었기도 하고, 가족이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다시금 마음속에 새기는 일이기도 하였다. 서로를 믿고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등이 되어주는 가족이 있음을 확인한 시간이 가족 여행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 (2014. 11) 티웨이 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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