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에서 부여까지는 무려 다섯 개(당진영덕간, 경부, 호남, 당진영덕간, 서천공주)의 고속도로를 넘나들며 지그재그로 내륙을 횡단하는 코스였다. 우리나라의 도로망이 어떻게나 잘 뚫려 있는 지를 직접 달려보아서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방도로는 천천히 달리면서 풍경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이라면 고속국도는 앞만 보게 되어 여행의 흥미는 좀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청주쯤에선가 산 중턱에 지어진 마을을 얼핏 보게 되었는데 고속도로만 아니라면 내려가서 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그것도 조수석에 앉은 내나 봤을 풍경이지 100키로 넘게 달리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남편은 그저 달리기만 할 뿐이다.
부여에 도착하니 백마강이 제일 먼저 부여임을 알려준다. 백마강은 금강의 일부 구간을 칭하는 별칭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시인신동엽 생가이다. 그의 출생에서 죽음까지 보여주는 전시물을 보며 사회문제를 이처럼 뜨거운 목소리로 노래한 그의 문학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민주세력에 스며든 기회주의 세력을 비판하고 통일을 노래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껍데기는 가라> 등 참여시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다음으로는 국립부여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은 부여 외곽 한적한 곳에 있었는데 백제의 역사와 유물들로 흥미 있는 전시가 많았다. 특히 백제금동대향로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살짝 떨리기도 하였다. 대향로는 화려하고 정교하다. 연꽃무늬와 용의 모습은 찾을 수 있었지만 백과사전에 나오는 여러 물상들을 다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 아름다움이 어디 가랴. 사진을 찍으니 빛이 반사되어 실제보다 더 화려한 금색을 나타냈다.
독널은 항아리관인 셈이다.
백제 시대의 머그
금으로 된 꽃쟁반
백제금동대향로 가히 세기의 발견이라 할만 하다. 부여 능산리 절터의 아궁이에 고이고이 감춰져있던 완전한 모습 그대로 발견되었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섬세하다.
많은 감흥을 받고 박물관을 나오니 어느덧 해가 지고 땅거미가 올라오고 있다. 만수산까지 가려면 한참을 가야한다. 물론 가는 길에 식당이나 가게도 없을 터, 시장에 들렀다. 시장도 날이 저물어서인지 한산하다. 족발을 샀다. 이제부터는 북쪽을 향해 달려야한다. 벌써 사방은 분간하기 어렵게 어둡다. 밤의 시골길은 좁고 어두워서 조심해야 한다. 이렇게 어두운데 우린 어디로 가는 것일까. 잠자리를 찾아가는 길. 정해진 잠자리가 없다면 얼마나 막막할까. 새삼 집이라는 단어가 주는 안도감과 아늑함이 저절로 생각났다. 평소에 집에 대해 얼마나 고마워하는 마음을 갖고 살았나. 우리 집, 그래서 모두 내 집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그 밖의 이유들이 더 크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30분 넘게 족히 걸렸나보다. 만수산휴양림에 도착했다. 휴양관의 숙소는 2층에 달랑 3호 뿐이고, 1층은 창고인지 인적이 없고 너무나 적막해서 자칫 무서울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다행히 우리랑 비슷하게 입실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조금 나았다. 국립휴양림과 군립휴양림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시설과 비품들을 보며, 조금은 실망스러웠지만 지금은 별다른 도리가 없다. 어쨌든 하룻밤을 지냈다. 퇴실하면서 보니 계곡에는 수영장도 있어서 여름에는 아이들과 쉬러 오는 사람들이 있겠구나 싶었다.
휴양림 가까운 곳에 무량사라는 절이 있다. 엄마한테서 자주 들었던 이름이라 찾아가보기로 하였다. 무량사의 느낌은 법주사보다 소박하고 편안하다. 절의 규모도 그렇게 크지도 않았다. 특이하게도 김시습초상을 모신 전각이 있다.
시대의 모순에 철저히 저항했던 사상가로서, 또한 시인과 소설가로서 파란한 삶을 살았던 김시습이 오랜 방랑을 끝내기로 한 걸까 마지막으로 무량사에 머물게 되고,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금오신화>를 저술한 소설가 매월당의 영정을 보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언뜻 신동엽시인과 김시습과의 공통분모가 만들어졌다. 15세기의 김시습, 20세기의 신동엽을 묶어주는 단어는 “저항시인”이었다. 삶이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문학을 통해서 사회 모순을 드러내고자 했던 점에서는 다르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부여 여행에서 이 두 시인을 만난 것이 큰 기쁨이 되었다. 물론 백제금동대향로를 직접 본 것도 매우 경이로운 일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