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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내 생의 봄날은- <화양연화>를 보고-
    읽고 보고 그리고..... 2021. 9. 9. 15:55

    왕가위 2000년 (이 글은 영화헤살꾼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려면 인내심이 있어야 했다. 한 번 봐서는 절대로 이해가 안 되는 줄거리와 감독 특유의 미장센 때문이다. 그리고 생략과 암시가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서 촉각을 곤두세워 봐야 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영화에 삽입된 음악만으로도 관객을 매료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만큼 멋진 영화라는 것이다. 더구나 볼거리는 얼마나 많고 자세히 보면 찾게 되는 숨은 그림은 또 얼마나 쫄깃한 맛을 보게 하는 지 완전 매력 덩어리였던 게 그의 <화양연화>였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두 부부가 같은 날 같은 건물로 이사를 오게 된다. 이삿날 짐꾼들은 이삿짐을 나르다가 호수를 착각해서 양조위(차우)와 장만옥(수리 첸)의 물건이 바뀌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영화 내용의 중요한 복선이 아닐까 싶다. 짐처럼 사람도 원래의 내 것이 영원한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고 맹세를 하지만 그것을 지켜낼 수 있을까. 많은 일들은 자신도 모르게 생기는 법인데...

    영화는 1960년대 홍콩의 주택가 한 건물에 여러 가구가 살고 있는 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혹시 이 물건이 차우 씨 댁 거 맞나요?”                                                               

    “맞아요. 그럼 이것은 첸 부인 댁 거 아닌가요?”

    단순히 어떤 물건이 바뀐 거라면 그런 일들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바뀐 것은 서로의 배우자였다. 핸드백과 넥타이가 주요 물증으로 나오고, 그걸 확인하는 과정에서 옆집 아내와 옆집 남편의 만남이 잦아졌다. 그리고 바람난 서로의 배우자가 처음에 어떻게 만났을까,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등등을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만 그들도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져 버린다.

    양조위와 장만옥은 여느 영화처럼 배우자의 일탈에 대해 분노하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는다. 불륜의 당사자들은 어쩌다 뒷모습으로 또는 목소리만으로 출연한다. 극히 양조위와 장만옥만의 행동과 말과 심리 묘사로써 보는 이들이 판단하고 이야기를 이해하게 만든다. 한 장면 한 장면을 심혈을 기울여서 보고 듣지 않으면 이야기는 꼬이게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장만옥이 양조위의 집에서 나는 남자 목소리를 듣고 그 집의 벨을 누른다. 목소리만으로 표현되는 양조위의 아내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장만옥이 돌아간 뒤에 양조위의 집 안에서 들리는 양조위 아내의 대사가 있다. “당신 와이프가 왔었다.” 이걸 듣지 못했다면 혹은 누구의 말인지 몰랐다면 불륜 커플의 행각이 가시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양조위와 장만옥이 만나서 배우자의 일탈을 확인하며 밥을 먹는 장면이 나올 때, 같은 식당, 같은 자리, 같은 식기지만 변하는 게 하나 있는데 장만옥의 치파오다. 그녀의 옷이 바뀌면서 같은 날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하는 감독의 미장센...

    특히 장만옥은 중국 고유 의상인 치파오만 입고 나오는 데 그 자태와 몸매가 너무나도 세련되고 기품이 있다. 화양연화의 장만옥을 생각하다가 다른 영화의 장만옥을 보면 생경하다. 갖가지 패턴과 색깔의 치파오는 장만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러나 그 타이트하고 꽉 조이는 치파오 역시 그녀의 심리를 대변한 도구이지 않았을까. 양조위는 본인 아내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처럼 무심한데 장만옥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자이기 때문일까. 마음은 양조위한테 끌리지만 몸은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무엇인가에 얽매어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장만옥은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게 되고, 함께 지낸 그후로 양조위는 싱가포르로 떠난다. 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을 간직한 채 일에 매진하던 그에게 장만옥이 찾아오고 양조위는 비밀을 앙코르와트 사원의 돌기둥에 묻어버린다.

    세월이 흘러 1966년이 되었다. 홍콩의 세 들어 살던 그 집에 장만옥이 다시 살게 된다. 그리고 양조위도 자기가 살던 집을 찾아온다.  그 시절을 잊지 못해 같은 시공간을 그리워하는  듯한 두 사람. 양조위가 자기가 살던 집에 찾아와 옆집에 대해 물어보자 “엄마와 아들 만”사는 집이라고 한다. 그것에 대해 양조위의 반응은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장만옥의 아들이 누구의 아들인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유추한 결과 양조위의 아들이라는 결론을 지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라면 굳이 좁고 불편했던 이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며, 모자 세대가 되지도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장소로 돌아온 것은 그곳에서 머물던 괴롭고도 찬란했던 화양연화의 삶이 그리워서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줄거리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이들의 마음속에 일렁이던 파도 같고 바람 같은 움직임이 있을 때면 흘러나오던 노래가 있다. 노래 <화양연화>와 <quizas, quizas, quizas>는 감성을 한껏 고조시키며 영화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화양연화의 뜻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시절이라고 한다. 양조위와 장만옥의 화양연화를 보며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을 생각한다. 배우자의 불륜으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사랑, 이 세상 사랑 중에 가장 위험하고 짜릿할 것 같은 불륜이라는 금지된 장난의 이야기를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 수가 있을까.

    <화양연화>를 보고 내 삶의 봄날은 언제였나 생각한다. 영화를 같이 본 친구는 20대라고 했다. 나는 지금이 제일 좋다고 했다. 이성과의 끌림, 설렘, 만남과 헤어짐은 없지만 하루하루 욕심 없이 살 수 있어서 좋다. 자연을 가까이 하면서 배우고 좋은 사람들과 대화하며 공감하고, 크게 더 잘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지 않는 지금이 나의 화양연화라면 매우 싱거울까. 다른 사람들의 평이 무엇이 대수랴.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를 맞이할 수 있어서 고맙고, 저녁에는 별일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이것이 나의 화양연화다.

    <화양연화> 덕분에 왕가위 영화를 많이 보게 되었다. <아비정전>, <해피투게더>, <중경삼림>, <일대종사>, <동사서독>, <2046>까지 양조위와 장국영이 거의 주연으로 나왔다. 왕가위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영상과 영화를 더욱 풍부하게 해주는 음악, 절제된 대사와 대사 없는 영상 등에 푹 빠져 보낸 여름이었다. 그리고 양조위의 젊었을 때부터 점점 노련해지며 나이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그의 깊은 눈빛, 따스한 표정으로 머리에 남아 오래오래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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