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어내려면 당시의 사회상과 역사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도움이 된다. 책에는 수많은 주석이 달려 있어 내용 이해에 도움을 주지만 키워드를 찾아 검색해 보는 것이 더 쉬운 방법이 될 수도 있다. 1327년 당시는 십자군 전쟁에서 패하여 재정이 바닥난 카톨릭 교회의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탄생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가 통합되는 정치적 상황에서의 황제의 권력 싸움이 바탕으로 설정된다. 양 파벌들은 한 수도원에 모여 시급한 현안인 청빈 논쟁에 대한 회담을 열기로 한다. 수도원 순례를 하던 사부님 윌리엄을 보필하던 내가 수도원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 현존했던 인물들과 허구의 인물들이 뒤섞여 나오는데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누가 누구인지,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헷갈릴 수가 있다. 그리고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청빈 논쟁도 주요 줄거리의 한 축이 된다. 그때의 석학들이 모여서 자기파의 주장을 펼치는데, 회담은 무엇을 위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일까. 교황파와 황제파가 모이는 곳은 북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인데 이곳은 반교황파인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의 수도원이다. 서술자는 18세의 아드소라는 베네딕트 수도원 수련사인데, 아직 인생 경험이 많지 않은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수도원의 살인 사건과 청빈 논쟁, 그리고 연쇄 살인범은 어떻게 그려질지 시작부터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새 천년이 시작된다는 것은 언제나 그 불확실성에 대한 두렵고 불안한 분위기가 만연하는가 보다. 21세기가 시작될 즈음에도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헛소문들이 팽배해 있었는지 아직도 몇몇 이야기는 기억이 난다. 수도원의 붙박이인 노수사 알리나르도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는 13백 년대이지만 그리스도의 죽음 300년 후부터 새 천년이 시작되었다는 이유로 아직은 13세기인 셈이다. 세기가 바뀔 무렵에는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이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 연유한 의혹과 의심이 팽배해지는데, 이런 심리에 요한 묵시록에 계시된 예언이 맞아떨어지면서 수도원은 더욱 불안해진다.
제1일
윌리엄 수도사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로 이교도에게서도 배울 게 있으면 배워야한다는 열린 마인드를 갖고 있었으며, 생활적 규칙에서도 엄격한 준수보다는 자유로움을 즐겼고, 책을 다룰 때는 섬세했으며, 과학에 대해서도 박식했다. 수도원 입구에서 마주한 사건을 풀어내는 사부님의 통찰력은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내는 방법과 사물과 환경에 대한 탁월한 관찰력의 소유자임을 알게 한다.
우리가 수도원에 도착한 첫날, 젊고 유능한 채식 장인인 아델모라는 수도사가 절벽 아래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이미 사부님의 탁월함을 알고 있는 수도원장의 부탁으로 사부님이 사건을 수사하게 된다. 수도원은 장서관으로 유명한지라 사부님의 촉감은 벌써 장서관으로 향하는데 원장은 구구한 이유로 장서관 출입을 막는다.
막으면 어떻게 될까. 뭔가 있다는 예감은 더욱 커지고, 더 가고 싶어진다. 수도원에는 노수도사가 세 명 있는데 우베르티노라는 프란체스코 엄격주의파 핵심 인물과 이 수도원에 가장 나이가 많은 알리나르도와 장님이지만 모르는 게 없는 호르헤라는 노인이다.
우베르티노 수도사가 교황 요한 22세가 엄격주의파를 탄압했던 저간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윌리엄 사부님은 이런 말을 한다.
<알고 보니 사악한 자들의 약점은 도덕 높은 분들의 약점과 같더란 말입니다> 또 자연을 예찬하는 말 <하느님은 참 좋은 분이시지요. 자연을 낳으셨으니.....>
사부님과 우베르티노는 서로 의견 대립이 있었어도 싸우지는 않았다. 사부님은 우베르티노에 대해서
<이단자의 악덕과 추기경의 악덕을 고루 갖추신 분>이라며 <지옥이 다른 각도에서 본 천국>이라는 다각도론을 말씀하시기도 한다. 욕장과 채마밭 관리를 하는 세베리노 수도사를 만나 아델모과 친하게 지냈던 수도사들 명단을 입수한다. 문서사자실에는 사서 말라키아가 있고, 번역가인 베난티오도 소개 받는다. 사서 보조인 베렝가리오가 있고, 유리세공사인 니콜라 수도사도 있다. 윌리암은 니콜라에게서 장서관 안에서 괴물을 본 사서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이런 저런 소문을 들으니 장서관에 대한 무언가 감추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아델모와 베렝가리오의 이상한 관계를 알아내게 된다.
<우리 시대의 식자들은 대개 난쟁이의 무등을 탄 또 하나의 난쟁이일 경우가 많습니다> 니콜라와 면담 중 사부님이 하신 말씀이다.
저녁 식사 때, 사부님은 당시로는 귀한 금속제 삼지창을 능숙하게 다루신다. 그리고 원장과의 대화에서 본관으로 통하는 문이 또 하나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는 사부님.
<진정한 앎이란 알 수 있었던 것, 알아서는 안 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 사부님의 속마음이다. 장서관의 비밀을 알아내고 말겠다는 스스로의 다짐 같다.
제2일
다음 날 아침, 그리스어 번역가 베난티오가 돼지 피 항아리에 거꾸로 처박힌 채 죽어있다. 여러 정황을 살펴 본 사부님은 장서관에서 죽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무 의미 없는 말에도 이로써 드러나는 의미 밖의 의미가 있다>
원장은 윌리엄과 소형제파 수도회 논쟁을 벌이다 레미지오의 이름을 흘린다.
연이어 나타나는 수도사의 죽음은 수도원 전체를 뒤숭숭하게 만들고, 수도사들이 두건을 쓰지 않아도 되는 기도 시간에 사부님은 수도사들의 표정을 살필 수 있다. 베렝가리오, 말라키아, 베노 등 누구를 공략해야 할까
<가장 허약한 이를 찌르되, 가장 허약한 순간에 찌른다>
성무가 끝난 후, 사부님은 베노에게 접근하여 호르헤 수도사가 아델모의 창의적인 채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낸다. 호르헤가 아델모의 그림에 호의적 태도를 보인 베난티오를 꾸짖었다는 말을 듣는다. 또 베난티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웃음을 진리의 도구로 생각한 것이라고 말했다는 데 호르헤는 이를 사악한 것이라 반박하며 『시학』 제2권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신의 섭리라고 주장했다는 말을 듣는다. 베노는 사부님에게 장서관을 꼭 조사해야 할 것 같다는 언질을 준다. 베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서일까, 이미 아는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싶은 것일까. 그다음에는 베렝가리오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는데 베렝가리오와 아델모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베렝가리오는 말 못할 이야기를 윌리엄에게 고해할 것을 청하나 사부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네 입을 여는 것으로 내 입을 봉하려 하지 마라>
식료계인 살바토레 수도사는 양치기들에게 먹을 것을 건넨 일로 요리장 수도사에게 꾸중을 듣고, 아이마로 수도사는 장서관을 공개하지 않는 것에 원장에게 격분한다. 사부님은 베난티오의 서안에서 어떤 단서를 찾으려 하나 수도사들의 방해를 받게 된다. 베노는 문서사자실에서 사부님을 유인해 내려고 잔꾀를 부리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주게 된다. 베렝가리오는 아델모에게 정욕을 품게 되고, 보조 사서인 베렝가리오의 환심을 사서 지식욕구를 채우고 싶었던 아델모는 수치스러운 관계를 호르헤 수도사에게 고해하러 간 다음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다 들으신 사부님은 순결의 서원을 지키지 못한 아델모는 고해성사를 통해 사면 받고 싶었지만 정황상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한편 베난티오는 아델모가 베렝가리오를 통해 들은 장서관의 비밀을 아델모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고, 베렝가리오도 이 사실을 알고 장서관 비밀을 발설한 책임이 저한테 있음을 알고 겁을 먹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우리가 교회의 제단 앞에서 갖가지 보물을 점검하고 있을 때 원장이 다가와 귀물들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는다. 그때 사부님은 더할 나위 없이 겸손하게 맞장구를 친다. 조금 있으면 황제파와 교황파의 회담이 열릴 텐데, 살인 사건이 발생한 지금 원장의 속은 속이 아닐 텐데 다음 날 수도사의 죽음이 하나 더 늘어났다.
사부님이 회랑에서 산책을 하고 있을 때, 장서관의 역대 사서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노수도사 알리나르도를 만나게 되고, 장서관이 미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장서관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에 대해 알게 된다.
원장은 사부님과 소형제파 수도회 논쟁 중에 레미지오의 이름을 흘린다. 아마도 장서관으로 향하는 사부님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목적인 것 같다. 레미지오는 2년 전 소형제 수도사들이 지하로 잠적했을 때 이 수도원으로 왔는데 살바토레도 함께 왔다.
성무가 끝나고 수도사들이 각자 독실로 흩어졌을 때, 사부님과 나는 납골당을 통해 문서사자실로 들어갔다. 베난티오의 서안에 있던 책 한 권이 사라졌음을 알아차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양피지를 주워 살펴보니 알 수 없는 부호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괴한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쫓아갔지만 잡지 못한다. 괴한은 사부님의 안경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유능한 조사관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에게도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에서 혐의를 두는 법>
한밤중에 우리는 다시 문서사자실로 잠입하는데 금단의 방은 7면벽실로 이루어진 창이 없는 방이었다. 그 중에는 문이 있는 방도 있었는데 상인방에는 요한묵시록의 글귀가 적혀있다. 방과 방은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어, 알리나르도가 말한 미궁 속이었다. 어느 곳에는 형상을 왜곡시켜 보이게 하는 요상한 거울이 있었고, 무언가 타고 있는 불빛이 있는 방에서 나오는 냄새에 환각 상태를 느낀다.
장서관은 교묘하다. 침입한 자는 알 수 없는 미로와 거울, 약초 연기, 환기구를 통해 흐르는 바람에 홀려 귀신이 있다고 믿게 되어 있다. 간신히 빠져나와 요사 입구에서 베렝가리오의 실종 소식을 듣는다.
제3일
베렝가리오의 방에서 피 묻은 천이 발견된다.
문서사자실의 수도사들은 두 형제가 죽고 한 명이 사라졌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자 자기 일에 몰두해 있다. 나는 이런 냉정함이 우리 교단을 지탱해 온 견고함이라고 비웃게 된다. 문서사자실의 수도사들은 모두 장서관과 장서관의 규칙과 금기에 완전히 매료당한 사람들이며, 장서관을 위해 사는 사람들인데, 지적 호기심으로 장서관의 비밀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은 왜 죽어야만 할까. 그들에게는 지적인 해갈에의 유혹이 있었고, 지적인 금기가 있었다. 서책은 독서의 대상인가. 보존의 대상인가. 나는 수도사 한 명 한 명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살바토레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그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듣게 된다. 살바토레는 기근과 수탈에 시달린 농민의 아들이었다. 그는 집을 나와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부랑자가 된다. 살바토레는 박해 받던 프란체스코 수도사 말씀을 듣던 중 감화를 받아 탁발 수도사 무리에 가담하게 된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수도사가 된 그는 어설프게 배운 교리와 라틴어, 여러 지방의 사투리 등의 잡탕 언어를 썼다. 그는 십자군 원정 이야기에 매료되어 폭력 집단의 동아리에 들어가지만 군대에 쫓겨 도착한 곳이 소형제회 수도원이었고, 이곳에서 레미지오를 만난 것 같다. 살바토레의 지난한 여정은 이탈리아를 술렁이게 했던 수많은 사건과 운동의 축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살바토레에게 돌치노를 아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우물쭈물 자리를 떠버렸다.
오전에 사부님은 니콜라에게 안경을 맞추고 계셨다. 내가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살바토레 얘기를 하고 사부님은 인간의 고유성과 다양성에 대한 견해를 설명하신다. 그리고 이단 교파의 차이점도 알려 주셨으나 옳고 그름이나 선악에 관한 본인의 의견은 말씀하지 않으셨다.
만과 때에 원장은 사부님께 교황 측 사절단장이 이단 심판관으로 유명한 베르나르라는 것을 알려준다. 원장은 베르나르의 폭력성이 협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우려했다. 사부님은 베르나르는 교황청의 모사라고 하셨다. 원장은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수도원 살인 사건이 해결되지 못할 경우에는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음을 예고했다. 사건을 해결하려면 장서관 출입을 허락해달라는 사부님의 요구를 원장은 거절한다.
사부님은 장서관의 미로에서 요긴하게 쓸 나침반을 생각해 낸다. 그러나 나침반을 제작해야만하는 현실에서 사부님의 과학적 지식이 총출동한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아시는 것도 이와 같을 게야. 만드시기 전에 그분 뜻으로 이리저리 재였을 테니, 그러나 우리는 이 안에 살기 때문에 만들어지고 나서 보았기 때문에 그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일 게다>
장서관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관 밖을 탐색하여 방위를 그리고 장서관 잠입 순서대로 도면을 그려보았다.
저녁때를 놓친 사부님을 위하여 살바토레를 찾아간 나는 그에게서 명마를 만드는 방법을 듣고 건락떡을 얻어온다. 그리고 그는 사부님께서 필요할 것이라며 등잔을 준다.
복잡한 머릿속에 잠이 들어올 틈이 없어 나는 우베르티노 수도사를 만나러 교회로 가서 돌치노 수도사 이야기를 듣게 된다. 노수도사는 더러운 이야기도 과유불급의 교훈이 된다면서 들려준다. 돌치노가 가짜 그리스도 행세를 하다 화형 당한 이야기 끝에 살바토레가 돌치노를 따라다닌 것 같다고 하자 우베르티노는 정색하며 그는 착한 수도사라고 한다.
<이것과 저것이 다름을 알기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우베르티노가 말씀을 마치고 기도를 시작하자, 나는 장서관 잠입을 실행한다.
문서사자실에서 돌치노에 관한 원고를 발견한다. 그 원고를 읽으며 돌치노는 순교자인가, 저주 받은 자인가하는 생각으로 어지럽다. 장서관 미궁에 들어섰다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고 장서관에서 빠져나오려 계단을 내려오니, 빵 가마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여자의 흐느낌이 들렸고 문을 향해 도망치던 그림자를 보았다. 나는 여자에게 다가갔고, 순결의 서약을 깨는 죄를 범하였지만 일생 처음으로 환희에 떨리는 경험을 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자는 사라지고 염통이 들어있는 보자기가 남아 있다.
한밤중 주방의 나는 사부님에게 발견된다. 나는 사부님께 일탈에 대한 고해성사를 하고 사면을 받는다. 나로부터 어젯밤 이야기를 들은 사부님은 이 사건이 식료계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다.
교회 통로에서 알리나르도를 만나 그에게서 요한묵시록을 인용하면서 세 수도사의 죽음을 단일한 악마적 소행으로 보는 말을 듣고 무심코 베렝가리오는 물과 관련해 죽었을 거라는 심증 끝에 욕장에서 시신이 된 베렝가리오를 발견하게 된다.
제4일
베렝가리오를 수습하던 세베리노는 베난티오의 손가락 끝에서 보았던 변색 흔적이 베렝가리오에서는 손끝과 입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확인한다. 세베리노는 시약소에 보관 중이던 극약 단지를 잃어버린 적이 있다고 한다.
시약소를 나섰을 때 살바토레를 만났는데 사부님은 단번에 살바토레의 어젯밤 여자에 대한 실토를 받아낸다. 여자를 불러낸 것은 살바토레 자신이며, 레미지오를 위한 일이라고 했다. 세베리노가 사부님의 잃어버린 안경을 들고 나타나고 니콜라도 새 안경을 들고 찾아온다.
나는 여자의 일로 생각이 많다. 그 일은 내 영혼을 육신의 죄로 전락시켰지만 그러나 참회하고 영혼으로 하여금 창조주와 이 세상의 이치를 알게 하였다.
사부님은 레미지오의 양피지 암호를 해독하셨다고 한다. 그것은 피니스 아프리카에를 압축시키거나 그대로 베껴놓은 것 같다고 하셨다.
<장서관이라고 하는 게 진실을 교란시키지 못하도록, 다른 진실은 가두어 놓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일까?>
나는 혹시 살바토레를 따라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하며 산을 내려가다가 프란체스코 사절단이 오는 것을 보고 수도원으로 되돌아온다. 사부님과 우베르티노는 반갑게 맞이하나 교황 요한22세에 대한 성토와 비난은 멈추지 않는다. 연이어 교황청 사절단도 도착했는데 거들먹거리는 추기경보다 베르나르 기에 관심이 간다. 사부님과 베르나르는 적의에 찬 시선을 교환한다. 베르나르는 수도원 경내를 돌아다니며 농부와 잡역 노동자들을 예의 쏘는 듯한 눈길로 상대방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만과 시 만난 알리나르도는 요한묵시록에 관한 주석서를 모조리 모았다는 장서관의 전 사서 이야기를 한다. 사절단을 위한 초호화판 식사가 끝나고 살바토레를 따라가서 여자를 꾀일 수 있는 주술을 알게 된다.
다시 사부님과 장서관에 잠입하여 서책을 찾아 읽어보다가 코란이 발견되자 내가 사(邪)서라고 하자 <사서라고 하지 말고 우리 성서와는 유가 다른 지혜가 담긴 서책으로 부르거라> <서책이라 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새로운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삼는 것이 옳다>, <아무리 그 뜻이 고상하다하더라도 언어적 관념이라는 것은 반드시 논의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 <신학적 미덕에는 믿음 말고도 두 가지가 더 있는데 하나는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이고, 또 하나는 가능하다고 믿는 인간에 대한 자비이다>, <때로 인간의 육체가 인간의 마음에다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관념의 흔적이라고 하는 것인데, 관념은 만물의 기호요, 형상은 기호의 기호, 관념의 기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육체나 관념이 없어도 이미지로써 이를 재구성한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사부님의 사부님이신 로저 베이컨의 가르침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장서관 미궁에 대한 조사를 거의 끝냈다. 많은 책을 보고 읽었는데 사부님 몰래 읽은 책 중 <사랑의 거울>을 읽고 상사병에 걸린 나 자신이 어떻게 해야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한밤중에 살바토레와 여자가 경호병들에게 붙잡힌다. 황제측 사절단들은 이 사태로 근심걱정이 가득하다.
제5일
다음 날 새벽에 베르나르에게 서류를 건네는 말라키아를 보게 된다. 집회소는 처음 가보는 장소였는데 홍예문의 부조는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회랑의 부조와는 달리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림들이 말씀의 전파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니 복음서의 해석을 둘러싸고 오래 적대하던 사람들이 만나기에 집회소는 참으로 훌륭한 곳이라고 생각되었다. 해묵은 반목이 화합으로 끝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집회소 분위기는 프란체스코 회칙 지지자들과 회칙의 비판자인 교황청 세력의 토론장 같았다. 그리스도의 청빈에 대한 양측의 주장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사용은 하지만 소유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 황제측 주장이고, 교황측은 사용이 곧 소유라는 주장이었다. 토론장에서 우베르티노는 프란체스코의 박학답게 화려한 몸짓과 연설의 포문을 열고 목소리에는 설득력이 있고, 미소는 매혹적이었으며, 논리는 명쾌하고 힘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청빈에 대해서 양측은 네 탓 공방을 벌이다가 결국은 듣기에 민망한 욕지거리와 인신공격을 하고 추기경과 원장은 싸움을 뜯어말리기에 정신이 없다.
오후에 세베리노는 베렝가리오가 서책을 한 권 가져간 것 같다고 사부님께 알려준다. 사부님은 호르헤와 레미지오를 주시하라는 명을 남기지만 나는 그들의 행방을 놓치고 만다. 집회소로 돌아오니 분위기는 반전되어 훈풍이 돌고 있다. 사부님께 발언권이 돌아오자 일장 연설을 하신 다음 법을 제정할 때는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닌 총회에서 논의를 했으면 좋겠다는 의제를 낸다. 그리고 교황청의 직분은 영적인 것에 속하여 황제나 왕의 권한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한다. 신앙을 강요하거나 이단이라고 하여 벌을 내리거나 처단할 권리는 없다는 말도 하셨다.
세베리노가 없어졌다는 서책은 나중에 알고보니, 베노가 훔쳐가서 숨겨 놓았다는 것이었다.
베렝가리오 살해 혐의로 현장에 있었던 레미지오가 이단 혐의까지 얹혀져 베르나르의 심문을 받는다. 고문에 못 이긴 레미지오의 실토는 돌치노와 관련된 밀서 이야기로 이어져 말라키아까지 소환되고, 베노는 느긋하게 심문 현장을 관람한다. 베르나르는 이참에 개개의 수도사들과 수도원까지 한 줄로 꿰어 밀고 나가려 한다. 황제측을 제압해 버리고 논쟁의 종지부를 찍어버리려는 그의 야심으로 고문은 더욱 심해진다. 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레미지오가 살인 혐의를 발악적으로 인정하고 베르나르는 수사가 완전히 끝났음을 알린다.
베르나르는 승리에 도취하였지만 다음 표적은 우베르티노라는 듯 그를 향해 적의를 드러낸다.
이것을 눈치 챈 사부님의 우려로 우베르티노는 수도원에서 도망친다.
사부님은 베르나르는 범죄자를 찾아내는 일보다 피의자를 화형대로 보내는 일에 더 흥미가 있어보인다면 자신은 꼬이고 매듭진 것을 풀어내는 일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라서 장서관의 비밀을 찾는 일에 열중하고 싶어 하신다.
베노는 사부님과 마주치자 피하려고 하였지만 사부님은 그런 베노의 꼬리를 잡아끌고 갔다.
사부님은 베노에게 훔쳐간 서책을 내놓으라고 치고 들어갔는데 벌써 베렝가리오가 있던 보조 사서자리와 바꿨다고 했다. 즉 말라키아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사부님 말씀에 따르면 사부님의 사부님이신 로저 베이컨의 지식에 대한 갈망은 탐욕이 아니었다. 그는 그 지식으로 하느님 백성의 삶을 개선시키는데 쓰셨다면 베노는 제 삶을 가꾸는 수단과 비천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지식을 구한 것이라고 하신다. 베노의 행태가 탐욕이라는 것이다. 베르나르도, 교황도, 레미지오도, 베노도 탐욕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셨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선을 행해야만 그 대상에 기울이는 사랑이 참 사랑일 수 있는 법이다>
<서책의 선은 읽혀지는 데 있다. 서책은 하나의 기호로 밝히는 또 하나의 기호로 되어 있다. 기호는 이렇게 모여서 한 사상의 모습을 증언하는 게다. 이를 읽는 눈이 없으면 서책은 아무런 개념도 낳지 못하는 기호를 담고 있을 뿐이다>
종과 시간에 원장은 호르헤를 지목하여 강단에 서게 했다. 그는 용서할 수 없는 교만에 대해서 말했고 지식을 공부하고 보존하는 것이 이 수도원 수도사들의 근행 가운데 하나라고 강조하면서, 우리는 오로지 명상하고 닦고 보존할 뿐이며 찬란한 장서관을 갖춘 수도원의 의무라고 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은 마땅히 파기 되어야 한다. 이를 보존한다면 이것이 죄가 될 수 있다고 했으며, 장서관에 숨어드는 이들에게 주님의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제6일
조과 성무 시간에 말라키아의 자리가 비어있어 무슨 일인가 싶은 분위기였는데, 어느 틈엔가 그가 돌아와 앉아 있자, 모두 안도의 기색이다. 말라키아 좌석 옆에 있던 호르헤도 몇 번인가 말라키아가 왔는지 확인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말라키아가 갑자기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고 사부님이 일으켜 세웠지만 전갈 등 이상한 소리를 하다가 죽었다. 살인범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살인이 일어난 상황에 베르나르는 할 말이 없다.
찬양대의 합창이 들리는데 호르헤의 흐느낌 소리가 들려 왔다. 사부님은 말라키아의 오른쪽 손가락 세 개가 까맣게 변색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신다.
레미지오가 하던 식료계는 니콜라, 베노는 장서관 보조사서가 되었다.
니콜라는 우리를 휘황찬란한 지하 보고로 데려간다. 사부님이 말라키아에 대해서 니콜라에게 물었다. 그는 말라키아는 그리스어나 아랍어를 안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며, 베렝가리오 역시 멍청이였다고 한다. 베렝가리오와 아델모, 말라키아와 베렝가리오는 이상한 관계인데 말라키아가 베렝가리오와 아델모 관계를 질투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말라키아와 호르헤도 만남이 잦아 원장이 말라키아의 영혼을 지배한다면 호르헤는 그의 육체와 행동과 업무를 관장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것은 호르헤가 장서관에서 일어나는 일을 훤히 꿰고 있다는 말이다. 호르헤는 천재여서 그리스어와 아랍어 박사였으며, 그의 일과는 대부분 문서사자실이라고 했다. 그리고 보조사서인 베노가 원장의 임명을 받아 사서가 되는 날에는 베노도 장서관의 비밀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지하 보고에는 그곳의 노른자격인 성골함이 있었다. 그곳에는 주님의 옆구리를 찌른 창끝, 주님이 달렸던 십자가 나무 조각, 그 곳에 박혔던 못, 가시면류관 일부 등 이루 다 기억하기도 어려운 그 시대의 귀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하 보고에 대한 사부님의 생각은 달랐다. 그 곳은 수도사들이 서로 원장이 되려고 하는 이유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3시과에 죽은 수도사들을 위한 기도를 하려고 교회 안에 들어갔던 나는 잠깐 조는 사이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이상한 꿈을 꾼다.
비몽사몽 정신을 가누며 교회 밖으로 나오니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들이 떠나려 하고 있다. 한 시간 반 전에 교황측 사람들은 피의자를 데리고 떠났다한다. 꿈과 그들이 떠났다는 사실이 모두 충격으로 받아들였는지 나는 온몸의 감각이 마비된 것 같다. 나는 사부님께 꿈 이야기를 소상하고 구체적으로 말씀드렸는데 사부님은 『키프리아누스의 만찬』이라는 책을 언급하시며 나의 꿈 일부분은 사부님이 세운 가정 중의 하나와 일치하고 있다고 하셨다.
사부님은 문서사자실로 올라가 베노가 건넨 장서 목록을 받아 서책 한 권을 읽어보라며 주셨다. 나의 꿈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난 것이라고 하셨다. 그 책은 아랍어, 시리아어, 키프리아누스의 만찬 등의 내용이 들어 있는 책이었다. 사부님은 알리나르도가 누구에게 사서 자리를 빼앗겼는지 사서의 필체를 통해 알아보신다. 사부님이 베노에게 아델모 등이 수수께끼 이야기를 할 때 『키프리아누스의 만찬』이라는 책명이 거론되었냐고 묻자, 말라키아는 원장이 금서로 지정한 책이니 범접하지 말라며 화를 내었다고 했다. 알리나르도가 말라키아를 몹시 미워했다는 말도 했다. 사부님이 말라키아에게 서책을 건네 준 것이 베노 너이니 그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압박하자, 이상한 책을 열어보기는 했다고 실토했다.
오전이 되어 원장은 수도원 사건을 미리 베르나르에게 언질을 주라고 한 사부님을 원망하는 말을 한다. 결국 모임을 주선하고도 결과가 좋지 않았음에 화풀이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사부님은 겸손한 대꾸지만 원장의 폐부를 겨냥한 이유를 댄다. 이 사건들이 일어난 결정적 이유는 수도원의 역사에 있다. 죽은 수도사들의 관계가 마뜩치 않으며 사건은 한 서책과 관련이 있고, 그것은 『아프리카의 끝』이며 문제의 책은 말라키아가 애쓴 덕분에 밀실에 있다고 하자 원장은 놀라자빠진다. 원장은 나에게 여기서 보고 들은 얘기에 함구령을 내리지만 사부님은 원장의 고삐를 잡고 있는지라 호락호락하지 않다. 원장은 우리더러 여기서 떠나라는 궁여지책을 낸다. 원장의 호령에도 사부님은 떠날 때 떠나더라도 자기 할 일은 해야겠다고 하신다.
나는 외양간 주변을 예의 주시하다가 별로 이상한 것이 없자 교회로 들어갔다. 교회 안에는 모두가 자리에 있었으나 호르헤와 베노, 알리나르도도, 니콜라도 자리가 비어 있었다. 원장은 유달리 호르헤를 찾더니 수련사에게 모시고 오라고 했다. 교회 안에는 이상한 긴장과 침묵, 당혹의 순간순간이 계속되었다. 식사 시간에도 알리나르도와 호르헤는 나타나지 않았다. 수도사들이 교회를 나서고 우리는 외양간으로 가서 아프리카의 끝에 가기 위한 비밀의 열쇠를 찾으러 갔다. 그곳에서 나는 살바토레의 마법을 거는 방법 얘기를 사부님께 말했는데 그 얘기에서 사부님은 열쇠를 찾게 된다. 말과 말의 동음이의어에서 발생한 소재의 오해와 관련된 문제를 발견하고 문제를 알았으니 해법도 알게 된 것이다. 언어로 된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사부님은 깨달음에 대한 즐거움으로 당신의 이마를 퍽 소리나게 갈겼다. 그리고 나에게는 오늘 네 입을 통하여 진실을 두 번이나 드러냈다고 축원해 주셨다. 우리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장서관으로 잠입하여 “아프리카의 끝”으로 들어갔다.
제7일
우리가 밀실로 들어갔을 때가 한밤중이었다. 그곳에는 호르헤가 기다리고 있었다. 호르헤는 사부님이 이 사건을 풀어낼 줄 알았다면서 사절단 회의가 있던 날, 세베리노가 사부님께 서책 이야기를 하는 것과 사부님이 베노에게 『키프리아누스의 만찬』에 대해 묻는 것을 들을 수 있어서 사부님이 거의 다 알게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사부님의 추리한 것을 설명하자 그것을 다 들은 호르헤는 경탄해 마지않는다. 사부님의 추리는 비밀의 금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으로 어쩌면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을 것 같은 호르헤의 소장품이라고 말하자 호르헤는 사부님이 천부적인 사서라고 칭찬하며 자기 앞에 놓인 책을 사부님에게 건넸다. 시약소에서 펼쳐봤을 때 아랍어로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책이었다. 호르헤는 사부님한테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읽으라고 한다. 철두철미한 사부님은 세베리노의 장갑(손가락 없는 장갑이 아니라 온전하게 손가락이 있는 장갑)을 낀다. 사부님은 책의 목록이나 내용에 대해서 호르헤에게 묻고 호르헤는 창창한 기억력으로 40년 전에 읽었던 내용을 줄줄이 외운다. 사부님이 번역하면서 읽어내자 계속해서 읽어보라고 한다. 이제 사부님은 보지 못하는 자에게 설명을 시작한다. 나는 죽은 수도사들과 달리 장갑을 끼고 있다. 당신이 세베리노의 실험실에서 훔쳐간 독약을 입으로 가져가지 않기 위함이다. 책장마다 독을 발라놓고 그것을 침을 발라가며 장을 넘기면 독약에 중독되어 죽을 테니까. 베난티오는 서책을 훔쳐 미친 듯이 책장을 넘기며 읽다가 독약에 중독되어 주방으로 내려갔다가 베렝가리오에게 발견되고 베렝가리오는 베난티오가 피 항아리에서 익사한 것으로 보이려고 시신을 돼지 피 항아리에 넣었다. 베렝가리오도 서책을 시약소에서 읽다가 죽고 세베리노의 손으로 넘어간 책은 호르헤의 사주를 받은 말라키아가 세베리노를 죽이고 베노에게서 책을 빼앗아 읽어보다가 말라키아도 중독사했다는 추리였다. 호르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악마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 시키는 것을 “지혜”라고 부른다면서 웃음을 인간의 목적인양 오인하게 한다며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잊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이 인간이 이 땅의 환락경만으로도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해괴한 사상을 고취시킬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하며 이런 악서를 수도사들이 읽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길고 긴 웃음에 대한 호르헤의 걱정에 사부님은 악마는 바로 당신이야 하고 소리쳤다. 호르헤도 지지 않고 프란체스코 소형제회를 싸잡아 사부님께 욕바가지를 퍼 부었다.
<프란체스코 성인은 만물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라고 하셨다. 이 영감탱아>
호르헤는 지지 않고 규율을 내려 준 것은 자기네라고 우기며, 나는 하느님의 손이었다고 소리쳤다.
<하느님의 손은 창조하지, 감추지는 않는다>
호르헤 노인은 잠잠했는데, 서책을 소중히 감싸들었다. 그리고 책장을 찢어 입에 넣고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사부님이 책을 빼앗으려고 하였지만 그는 계속 씹어 삼키고 있다. 그러다가 호르헤는 등잔불을 꺼버린다. 사부님은 캄캄한 아프리카의 끝에서 소리쳤다. 호르헤가 못 나가게 문을 막아라. 하지만 갇힌 것은 오히려 우리였다. 밀실에서 간신히 나와서 쓰러진 호르헤를 발견했을 때 고승대덕의 풍모는 사라지고 독에 중독되어가는 흉측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나의 등불을 감지한 호르헤는 서책을 등잔불에 던져 양피지는 잘 마른 낙엽처럼 불길을 당겼다. 불길이 사방으로 번지고 호르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불길 속으로 던진다. 손 쓸 틈 없이 번져나는 불길 속에서 사부님은 물을 찾아다니고, 나는 사람들을 부르러 밖으로 뛰어나가 종탑에 매달렸다. 수도사들, 목동들 모두 난리가 난 채 우왕좌왕하는데 베노가 큰 물동이를 들고 계단을 올라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불에 달구어진 벽은 터지고 천장은 무너지고 아비규환이 되었는데 나귀들까지 놀라 이리저리 달아났다. 장서관에서 튀어온 불똥은 교회를 지나 대장간, 숙사 등 수도원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다. 어느 틈엔가 사부님은 행장을 꾸려 나오셨다. 이 광경을 보며 진짜 가짜 그리스도는 호르헤였다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