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을 열었다. 오늘부터 2박 3일간 집을 떠난다. 여행 가방을 끌고 남부터미널로 갔다.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타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고속버스를 탔다. 동행이 없는 혼자만의 여행은 생각할 시간을 많이 준다. 이런 저런 생각은 구름처럼 생겼다가 바람처럼 흩어졌다. 버스를 세 시간 동안 타고 있으면 구례에 도착하게 된다. 구례는 전에도 세 번이나 방문한 적이 있는 곳이다. 맨 처음 갔을 때는 생산지 방문이었다. 현지 생산자 댁에서 먹고 자고 얘기를 했다. 그리고 화엄사에 갔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여행으로 갔는데 올 때마다 좋았던 기억이 있다. 내가 조는 동안 도로 정체가 있었는지 도착 예정 시간이 30분이나 늘어나 있다. 구례터미널에서 피아골로 들어가는 버스는 한 시간마다 있다는 데 놓칠 것 같다. 연수원 프로그램은 3시에 시작한다고 했는데 어쩌나 싶었다. 마음을 졸이며 고속버스에서 내려서 가방을 나꿔채 끌고 서 있는 시골 버스로 달려가서 표지를 보니, 피아골이라고 써 있다. 타기 전에 물어보니 금방 떠날 거라고 한다. 아유, 살았다.
버스에는 나까지 4명이 탔다. 옆에 탄 중년 남자분이 나에게 어디 가냐고 물었다. 피정의 집요. 아, 거기 교회서 운영한다는 거기요? 근데 거기는 왜 간다요? 거기에 무슨 프로그램이 있어서 참석하려고 갑니다. 뒤에 있던 다른 중년 남자가 말을 받았다. 나, 거기 알아요. 나는 거기보다 두 정거장 앞에 내립니다. 그러고나서 첫 번째 남자가 말했다. 나보다 빨리 내리시네유. 나는 그 담서 내리는디. 버스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의 격의 없는 대화가 오간다. 내가 반내골이 어디냐고 묻자, 반내골을 워떠케 안대유? 쩌그여., 쩌그 산봉우리 뾰족허니 솟은 골짜기인디하며 창 멀리 어느 곳을 가리킨다. 소설가 정지아라고 소설 속에 나와요. 아버지의 해방일지라고 그랬더니 다른 중년 남자분이 아, 나도 알아요. 저는 피아골 학교에서 근무했던 선생이에요. 책을 많이 읽으시나봐요 그랬다. 아니 뭐, 별로 나는 겸손하게 답했는데 그분들은 벌써 나를 책 많이 읽은 사람으로 단정한 것 같았다. 남자분들도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동네가 작으니까 얼추 대강은 건너건너로 알음알음 아는 것 같았다. 옆의 남자분은 도시에서 일하고 고향으로 와서 쉬고 간다며 아내를 위해 예쁜 꽃밭도 만들었다고 자랑한다. 요즘 여자들 일하라고 하면 안 와유. 안 오지. 도시랑 똑같게 해 놔야해서 다 고쳤어유. 처음 보는 사람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것은 시골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다. 버스는 섬진강을 끼고 달리다 산길로 접어들고, 뱀이 기어가듯 구불구불한 길을 덜컹이며 달려간다. 자기들이 어디에 사는 지까지 알려주고 그들은 내렸다. 물론 피아골에서 언제부터 어떻게 살았는지도 다 말하고 잘 가라는 인사도 하고 헤어졌다.
내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그 자리에 연수 진행자님이 서 있었다. 미리 연락했더니 차 시간에 맞춰 기다려주신 것 같았다. 살금살금 나무 계단을 지나 프로그램이 시작된 강당으로 들어갔는데 하필 명상 시간이라 모두 누워 있었다. 일단 누워 있으니 몸이 편하다. 그러나 명상은 잘 되지 않고 헝클어진 잡념만 더 많아진다. 그래도 하라는 대로 시간은 흘러갔다. 저녁 시간이 되어 내 방에 올라갔는데, 정말 좋았다. 나 혼자 쓸 수 있었고, 창 밖 풍경도 이뻤다. 식사도 간단하고 소박했다. 맛이 깔끔했다. 식후에 씻고 누워 있으니 천국 같다. 바람도 알맞고 달빛도 좋다. 하늘에도 별도 총총 떠 있다.
아침 6시에 마당으로 나갔더니 일행 몇 분이 서 계셨다. 그분들과 함께 근처에 있는 절까지 걸어갔다 왔다.
오전 프로그램 중에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나는 누구 또는 무엇입니다"라는 답을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수업이 있었다. 나는 답하다 보니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도 나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름을 모이게 하고 흩어지게 하는 것은 바람이니 , 역시 나는 바람이라고 답한 것이다. 바람처럼 자유롭고 싶었고, 또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것도 내가 노력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야외에서 눈 감고 명상에 잠겨 있을 때, 멀리서 장닭이 목을 길게 늘이고 가느다란 목청을 길게 빼면서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고향의 풍경들이 다가왔다. 나는 잠시 편안함을 느꼈다.
오늘의 일정 중에 가장 큰 것은 피아골 깊숙한 곳까지 가는 일이었다. 숲에 뭉쳐다니는 모기가 많아서 다소 걸리적거리고 신경이 쓰였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피아골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생겼다는 피밭이 있었다. 벼농사를 짓는 논에 벼와 함께 피도 자라는데 우리 고향에서는 잡초라고 다 제거했는데 이 동네는 그것을 곡식처럼 양식으로 썼다고 했다. 산골짜기 특성상 벼를 재배할 수 있는 평평한 농지가 없는 터라 피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정말 어렵게 살던 그때 이야기다.
한 시간 정도 골짜기를 건너 산길을 오르다보니 삼홍소라는 곳에 도착했다. 가을이 되면 나무도 계곡도 사람도 빨갛게 물든다해서 삼홍소라고 했다나. 정말 그럴 것이 숲속 나무가 거의 단풍나무였다. 계곡 물은 맑고 수량도 알맞다. 작은 소 안에는 벌써 목만 내놓고 물아일체가 된 분도 계셨다. 나는 잠시 머리를 물속에 담그고 열을 식혔다. 이 방법도 괜찮았다. 몸을 전부 다 담그는 것도 부러웠지만 유난히 쓸 데 없이 예민해지기도 하는 내 몸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바위에 눕거나 앉아서 명상 시간을 가졌다. 너럭 바위 위에 누웠는데 따뜻하다. 저절로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물소리만 들리는 깊은 산속, 이 아름다운 숲속에서 그저 무념무상이 되고 싶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일행들과 조금 더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각 지역에서 모인 생면부지의 12명이다. 그래도 한살림이라는 테두리가 있어서 공동의 화제와 관심을 나눌 수 있었다.
밤에는 행사 마무리를 하는 느낌이 드는 마당에서의 어울림을 하였다. 명상 음악과 춤을 실제로 듣고 추면서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는 마당에 깔아놓은 돌이 낮동안 태양열에 데워져서 온돌처럼 따듯하니, 우리 몸을 지질 수 있게 모두 누워서 별을 보는 시간을 가졌다. 요즘은 어떤 것이 인공위성이고 어떤 것이 진짜 별인지 구별하기도 어렵다. 별을 찾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움직임 여부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수 광년 전의 빛이 지금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 말하니 모두 놀라는 눈치다. 내가 독서모임에서 읽고 있던 책이 마침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였기에 짧은 지식을 들려주기도 했다. 일행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오늘 마당 프로그램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있는 곳은 건물이 있는 마당이라 가로등이 많아서 일행과 함께 캄캄한 곳으로 이동하여 더 많은 별들을 볼 수 있었다. 별을 쳐다보느라 모두 뻐근해진 목덜미를 어루만지면서도 이 시간을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요즘에는 별자리 어플도 있어서 별자리를 찾아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숙소로 돌아가기가 아쉬운 듯 자꾸 밤하늘을 바라본다.
다음 날, 프로그램을 마치며 소회를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거의 좋은 기억을 갖고 떠난다고 말한 것 같다. 나도 그랬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시간이 여유가 있으면서도 알찬 기분이었다. 가끔은 이런 휴가가 필요할 것 같았다.
다음 날 각기 온 곳으로 떠나고 나는 다시 시외버스터미널로 돌아와 서울행을 기다렸다. 여담이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잘 지내셨냐고 나한테 인사를 하는 분이 계셨다. 난 어리둥절, 여기에 나를 아는 이가 있지 않을 텐데 했는데 어제 피아골 사신다는 인천 분이셨다.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며 구례 장날이라 장보고 들어가는 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