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한여름밤의 전쟁
    수리재 이야기 2010. 8. 6. 15:22

    휴가를 수리재에서 보내게 되었다.

    냉이 많던 이장네 문중 땅엔 옥수수가 제철이다.

    농사 고수인 금슬 좋은 이장네 부부는 옥수수도 예쁘게 잘도 키웠다.

    그런데 옥수수가 익을 무렵이 되니 걱정이 생겼다.

    산돼지가 벌써 시식을 하고 갔다는 것이다.

    속 좋은 이장은 "할수 없지, 뭐. 남는 거 먹어야지. 허허허"하고 웃었지만

    청평장에 내다 팔아야 돈 사는 이장네는 "아유, 속상하지 뭐. 돼지 주려고 키웠나." 하며

    근심스러워하였다.

     

    그러더니 그날 저녁, 집 앞 길가에 낯선 트럭이 서 있어 누군가 했더니 마을 포수라 하였다.

    잠복근무라 했다. 다음 날 아침 고추밭에서 먹을 고추를 따고 있는데

    옥수수밭에서 큰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장이었다. 한걸음에 달려가보니 옥수숫대가

    1소대 정도 쪼르르 넘어져 있고 열매가 없어진 게 돼지 짓이었다. 이장 주먹이 들어가는 큰 발자국과 작은 돼지발자국이 어지럽다. 이장은 포수한테 어찌된 일인지 전화로 묻고 있는 중이었다. 포수는 새벽 한 시까지 망을 보며 기다리다 집에 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개들이 두 세 시경 짖은 게 생각났다.

    아마 사람은 돼지 오기를, 돼지는 사람 가기를 서로 망을 본 것 같았다.

     

    그날 저녁은 보름 때라 구름 없는 하늘에 밝은 달이 너무도 아름다워 달구경하느라

    늦게까지 잠 못 들고 마당에 있었는데 개가 옥수수 밭 쪽을 향하여 짖었다.

    우리도 귀를 쫑긋 세우고 무슨 소리가 들리나 집중하였지만 가끔 바람에 스치는 옥수숫잎 서걱

    대는 소리와 소쩍새 우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저녁이면 오늘은 돼지가 잡힐까? 옥수수는 어찌 될까에 신경이 쓰여서 개 짖는 소리가 조금만

    나도 마당가로 뛰어나가 보았다. 그러나 밤마다 간헐적으로 개가 짖기는 하였지만 더 이상 피해는

    발생하지 않고 이삼 일이 지났다.

     

    저녁에 이장 부부가 옥수수밭 지키러 올라왔다. 포수는 삼 일을 고생만하고 포기 했는지 안온다고

    하였다. 두 부부는 구수하게 이야기도 잘 하였다.

    아무 것도 없는 이장이 좋아 말리는 친정 두고 시집 온 얘기며, 높은 산꼭대기까지 버섯따러

    다닌 얘기, 이장이 사우디로 돈 벌러간 얘기, 공항에서 만나 얼싸안고 운 얘기 등 밤을 새도

    모자랄 얘기를 들었다.

    열두 시쯤 되자 이장 부부는 집으로 가고 우리도 침대에 누웠는데 개 짖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옥수수 넘어뜨리는 소리가 우지직우지직하고 났다. 순간 긴장감에

    얼어 붙을 것 같아서 언니더러 빨리 이장한테 연락 하라고 하였다. 방에 들어가 폰을 가지고

    나와 이장한테 상황을 얘기하는 언니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십여 분 동안 옥수수가 넘어지더니 갑자기 큰 콧김소리가 쉑쉑하고 들렸다. 아이구 무서버라. 당장이라도

    우리를 향해 돌진해 올 것 같은 무시무시한 효과음이었다. "왜 이장과 포수는 안오는 걸까?"

    얼마쯤 지나자 달빛에 코너를 돌아 조심조심 올라오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꼭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사람 소리가 나면 도망가니까 혼자 올라온 것 같았다.

    우리도 귀만 마당가에 남겨놓은 채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날 새벽까지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맨 먼저 옥수수밭을 내려다보니 엉망이었다. "저걸 어쩌나." 안타까운 맘 뿐이었다.

    먹을 게 없어 사람의 농사를 노리는 산돼지도, 온 정성 다해 지어놓은 농사 망친 산돼지를 잡으려는 사람도

    같이 살 해법은 없는 걸까?

     

    끝나지 않은 싸움을 남겨놓은 채 집으로 돌아왔는데 결국 우리가 온 다음 날 산돼지는 잡혔다고 했다.

    올망졸망 새끼들과 옥수수를 먹고 있던 암퇘지를 잡았고 망을 보던 수퇘지와 새끼들은 놓쳤다고 한다.

    새끼 낳은 지 얼마 안되는지 젖이 불어있던 암퇘지는 비쩍 말라있었다고 했다.

    마음 한 켠이 애처로웠다. 세상 모든 만물의 자식 사랑은 다 똑 같구나.

    이젠 한동안 이장네 옥수수밭은 잠잠할 것 같다.

     

    '수리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냉이 어디 갔나요?  (0) 2009.03.24
    고추 농사  (0) 2008.10.06
      (0) 2008.09.29
    풀매기  (0) 2008.06.16
    모종 심기  (0) 2008.06.16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