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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벼농사를 추억하다
    사노라면 2020. 2. 17. 11:34

      묵은 볏짚으로 허리를 질끈 묶은 볏단들이 논둑에 쭉 이어서 서 있다. 흡사 사람들이 앞 사람의 허리와 등을 껴안고 연이어 서 있는 모양으로 낟알을 말리고 있다. 이제 일 년 농사를 끝낸 들판에는 쉼표 같은 그루터기만 남았다. 국민학교에서 돌아오던 나는 신작로를 버리고 논으로 들어간다. 논 주인이 챙기지 못해 버려진 나락이 있나 찾아보려는 것이다. 벼 이삭 하나하나를 주워 한 묶음이 되면 손에 꼭 쥐고 집에 와서 내 자루에 넣었다. 그렇게 가으내 모으다보니 한 자루가 될 만큼 저축이 되었다. 그것을 멍석에 펼쳐놓고 수수깡으로 알곡을 훑어내린다. 모아진 낱알을 바람모퉁이에서 높이 날리면 쭉정이는 멀리 날아가고 알곡만 바닥에 직선으로 떨어져 모아졌다. 알곡은 족히 두어 됫박은 될 것 같았다. 엄마, 우리 방아 찧을 때 이것도 넣어서 같이 해 줘요. 엄마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모은 쌀을 돈으로 계산해 줘서 마음을 울컥하게 하였다.

      노란 볍씨를 물에 담가 싹을 틔우는 준비를 하게 되면 농촌에서는 봄이 시작된다. 아버지는 차디찬 봄바람에 장화도 없이 물이 찰람한 논에 들어가 묘판을 만든다. 물속에 있는 아버지의 앙상하고 마른 다리가 더욱 추워 보여 논둑에 서 있는 내 마음이 아려온다.

      묘판에서 잘 자란 어린 모를 뽑는 것을 고향말로 모를 찐다고 하였다. 나도 부모님을 돕는다고 논에 들어간다. 부모님 하는 대로 허리를 굽혀 한 손에 볏모를 들고 한 손으로는 모를 심느라 허리를 펼 새 없는 데 거머리라도 다리에 붙어 있으면 얼마나 가렵고 무서운지 모른다. 거머리를 뗀다고 물속에서 비틀비틀 대다가 물속에 빠져버렸다. 아이고, 다친다. 고만하고 나가라. 엄마의 꾸중에도 난 나가지 않았다.

      부모님은 뼈가 으스러지고 몸이 녹신녹신 할 정도로 피곤에 절어도 초록색으로 물들어가는 논을 보면 피로가 풀린다고 하셨다. 우리들이 잘 크는 것만큼 벼들도 사랑스러운가 보다. 모내기가 끝나면 수시로 호미 들고 김을 매줘야 하고, 물꼬 관리를 잘 해서 필요한 만큼의 물조절을 해야 했다. 아버지가 뒷짐 진 손에는 늘 삽이 들려 있었고, 아버지 무릎까지 걷어올려진 바지는 언제라도 논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었다. 새벽에 일어나 논 한 바퀴를 돌며, 밤새 논둑이 터진 데는 없는지, 바람에 쓰러진 데는 없는지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된 날들의 연속이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도 걱정, 가물어도 걱정, 태풍에 쓰러질까 잠 못 자고, 새가 달려들어 쪼아 먹을까봐 조바심하며 키운 벼였다.

      벼를 베고, 단으로 묶고, 둑에서 말리고, 둑에서 집으로 지게나 리어카로 날라 마당에 쌓아놓기까지 일일이 손이 안가는 데가 없었다. 맑은 하늘에 가을이 깊어지던 날, 탈곡기의 와룽와룽 즐거운 노래를 들으며 알곡을 거두어들일 때까지 노심초사 부모님의 피땀이 한 알의 쌀이 된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밥 한 그릇에 농부의 일 년이 들어 있다는 것을, 많은 농부들의 일생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며칠 전에도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들녘을 보고 왔다. 보기만 해도 풍요로움과 감사함이 느껴지는 풍경이다. 지금은 비록 도시에 살지만 언젠가는 그 곳으로 돌아가리라 꿈을 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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